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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門 ) 공모전 정보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시, 소설, 희곡, 동화, 동시 5개 부문입니다. 새로운 감수성과 문제의식으로 빛나는 작가 지망생의 참신한 글을 기다립니다.

 

◆공모 부문

시=5편 이상ㆍ당선자 상금 300만원 

소설=200자 원고지 80매 안팎ㆍ500만원 

희곡=80매 안팎ㆍ300만원 

동화=30매 안팎ㆍ200만원 

동시=5편ㆍ200만원

 

◆응모 방법

원고는 A4 용지에 출력해 보내주십시오. 봉투에 응모 부문을 쓰고, 원고 표지를 별도로 만들어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써 주십시오. 응모작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합니다. 다른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한 작품, 이미 발표한 작품, 표절 작품으로 밝혀지면 당선이 즉각 취소됩니다. 낙선한 원고는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접수 마감

2020년 12월 4일(금요일). 우편 접수는 12월 4일자 소인까지이고, 방문 접수는 4일 오후 6시까지만 됩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편집국에 외부인 출입이 원활하지 않은 만큼 가급적 방문 접수 자제를 부탁 드립니다. 해외 응모자는 운송 시간을 감안해 소인 마감일보다 미리 보내 주십시오.

 

◆보내실 곳

(우편번호 04512) 서울 중구 세종대로 17 와이즈타워 17층 한국일보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당선자 발표

2021년 1월 1일자 한국일보. 당선자는 12월 중순쯤 개별 통보합니다.

 

◆문의

한국일보 편집국 문화부 (02)724-2328

 

◆저작재산권 관련 알림

입상작에 대한 저작인격권은 입상자에게 있습니다. 단 한국일보가 입상작을 선정하고 관리하기에 입상작의 저작재산권은 한국일보와 참가자 50:50으로 적용합니다. 최종 발표 후 한국일보가 입상자의 허락 아래 홍보ㆍ출판 목적의 수정과 변경, 활용을 할 수 있으며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를 중단합니다. 온라인에 기배포 되어 삭제가 어려운 입상작은 예외로 합니다.

 

www.hankookilbo.com/Notice/Read/N2020110216570001334

 

한국일보 : 세상을 보는 균형

60년 전통의 한국일보는 정정당당, 춘추필법, 불편부당의 자세로 한국 최고의 정론지를 지향합니다. 한국일보의 인터넷 뉴스서비스 한국일보닷컴은 클린 인터넷 뉴스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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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당선작/심사평/소감 확인 : www.hankookilbo.com/Series/S-PLANNING-SP-33-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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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당선작 ‘침착하게 사랑하기’  차도하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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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

저를 저렇게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

저분들 싸우나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2241162768739

소설 당선작 ‘전자 시대의 아리아’ 신종원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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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옥인동 구시가지 골목 한편에 세워진 화강암 기념비는 인왕산 일대에서 숭배되던 선바위를 떼어다 옮긴 것이다. 절벽 아래로 열두 채가 넘는 전통사찰과 신당을 거느렸던 십 미터 높이의 기암괴석에는 운반 당시의 채석용 끌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신성한 자연물이 허리가 잘린 모습으로 산비탈을 내려왔을 때, 당시 서울에는 전례조차 찾아볼 수 없는 폭우가 몇 시간이나 몰아쳤다고 전해진다. 어마어마한 무게 탓에 편백나무와 잣나무, 소나무 따위의 제재목을 수십 그루씩 베어다 만든 통나무 썰매가 운반 도구로 쓰였다는데. 서로 다른 종단 승복을 입은 승려들, 오색으로 날염된 저고리와 겉치마에 둘둘 싸인 무당들, 물려받은 상복을 꺼내어 입은 여러 씨족과 가문의 일원들, 그리고 흑립을 깊게 눌러 쓴 지역 양반 몇몇이 소리죽여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개중에는 한동안 경무국에서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됐었던 인왕산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한편, 기념비에 음각된 문자는 헤이안 시대의 서예가인 오노 도후小野 東風의 서체를 닮았다. 석공 작업에 참여한 일본인 기술자들 사이에서는 미치카제식 서법이 표준 글꼴로 통용되었던 모양이다. 해방과 전쟁을 잇달아 겪으면서 비석 곳곳이 광물 파편과 약산성 먼지로 날아가 버린 나머지, 지금은 거의 음운에 가까운 흔적들만이 겨우 들여다보일 따름이다.

불행한 사실 하나. 외진 길목 한가운데 우두커니 전시된 이 바윗돌의 용도를 아는 사람은 이제 남지 않은 듯. 오늘날 고궁 주위에서 길을 잃은 외국인 관광객 두어 명을 상상해보기. 아마도 그들은 우연한 경로를 지나 외딴 비석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지들이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발밑에서는 마른 나뭇잎과 열매껍질들이 바스락바스락 밟힌다. 벽돌담 사이로 걸으면서 그들은 옥인1길 34, 37, 42 같은 방식으로 이름 지어진 저층 가옥들을 두루 올려다볼 수 있다. 좁다란 골목은 한국사의 여러 시간대가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집집마다 서로 다른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관광객 둘을 처음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자. 나이 들고 몸 군데군데가 깎여 나간 기념비와 다시 마주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어떤 남자가 골목을 지나 뛰어온다. 땀에 흠씬 젖은 모습으로. 그는 관광객 둘을 앞질러 기념비를 반 바퀴 돌아가더니 별안간 사라져 버린다.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아가 보기. 거석 뒤편에는 작은 야외 산책로가 몰래 숨겨져 있다. 사두마차 하나가 오가기에 알맞은 너비로, 남자는 이미 멀찍이 앞서가고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기념비는 이 비밀스러운 정원의 입구를 감추기 위해 설계된 게 아닐지. 헐떡이며, 남자는 폭이 5미터쯤 이르는 철제 문짝을 잡고 안쪽으로 힘껏 민다. 끼익. 끼이익. 노쇠한 철조 구조물의 울음소리. 위로 자라나는 식물 줄기 형태로 장식된 주철 창살은 볼품없이 녹슬고 칠이 벗겨져서, 손바닥 안에 산화된 쇳가루를 한 움큼 쥐여 준다.

마침내 그가 다다른 곳은 어떤 건물이다. 멀리서 볼 때 건물은 얼핏 수납용 가구 한 채를, 혹은 그냥 상자 하나를 연상시킨다. 테레빈유와 수성 페인트로 빠짐없이 표백된 직육면체 건축물의 외관과 의장을 응시하기. 가만히. 예컨대, 어째서 이 건축물에서는 경사진 서까래와 처마 장식 같은 전통적 부가물을 찾아볼 수 없는가. 답은 그의 한쪽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 땀에 젖어 용지가 눅눅해진 헐값 출판물의 이름은 아마도 <세상에 없는 비밀 vol.4; 르 코르뷔지에는 어떻게 건축을 지배했는가―현대 건축법의 비밀>이다. 잡지 일면에는 한 프랑스인 건축가의 작업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몇몇 사진들은 인공 녹지 위에 지어진 상자형 주택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것이다. 남자와 마주 서 있는 직육면체 건축물은 이것을 참고해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다. 원본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 건물의 입면에서는 좁은 출입구 외에 어떠한 개구부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장식용 차양은 물론 작은 내닫이창 하나조차도. 심지어는 환기구마저. 희고 거대한 벽면의 폐쇄적인 표정만이 오롯이 드러나 있을 뿐이다.

출입구 앞에서 그는 등을 보이고 서 있다. 호흡을 고르는 동안 구부정하게 휜 흉추가 잠깐씩 불거졌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상의에 받쳐 입은 화이트셔츠는 과격한 운동과 열기로 인해 몸체보다 한두 사이즈쯤 들떠 있다. 그는 문고리 위에 손가락들을 올려본다. 미미한 크기의 전자기파가 그의 인체에 전해진다. 말단에서부터 점점 안쪽으로. 몸통과 목덜미를 지나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파동의 진동수를 나타낼 수 있다면 7헤르츠쯤에 가까울 것. 이 초저주파의 떨림은 가쁜 호흡과 탈진 상태, 가슴뼈와 배 밑에서 덜컹거리는 장기 근육들을 차츰 진정시킨다. 배 속에서 들었던 태교 음악처럼. 그는 초조하게 쥐고 있던 직원증을 입구 근처에 가져다 붙인다. 띡. 바코드 스캐너에 부착된 전자 인식기가 직원증 앞면을 읽는다.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그의 증명사진. 또는 함께 적힌 이름을 읽을 수도 있다. 박지형. 이윽고 문 뒤에서 잠금장치가 하나둘 풀리는 소리. 이내 그는 건물 안으로 홀연 사라져 버린다.

[▶] 1908년 10월 21일 인왕산 기슭에 개소된 대규모 수용시설. 시텐노 가즈마四天王數馬에 의해 고안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을 너는 잘 알고 있다. 그곳에서 녹음된 여덟 박스 용량의 레코드판이 달마다 네 앞으로 송달되어왔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좁다란 복도에 줄지어 서서 수화물을 실어 날랐다. 지하층에는 펠트 직물과 콘크리트 방음재로 겹겹이 둘러싸인 방들이 많았다. 아마도 연구자들은 그 안에서만 상자 포장을 벗겨볼 수 있었으리라. 너는 이 방들을 모두 기억한다. 오늘날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비밀 구역들을. 손잡이 부근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쇠사슬과 금고용 자물쇠 따위의 쇠붙이들은 철물보다는 생물에 가까워 보인다. 백 년이 저무는 동안 마치 저절로 자라난 것처럼. 도면에 따르면 지하층의 방들에는 작은 단상과 객석 이십여 개가 세트로 놓였다. 소박한 크기의 콘서트홀 내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무대 위에는 축음기 하나가 조용히 놓여 있다. 회전형 원반과 연결된 거대 확성기는 금관악기의 주둥이를 모방한 것이다. 한때는 연구용 가운을 입은 남자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객석에 앉았다. 이제 젊은 조수가 상자에서 꺼낸 음반을 축음기에 올려놓는다. 크랭크와 태엽 부품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 까득. 까드드득. 재생되는 음악은 목청이 찢어지는 비명, 고통이 지나간 뒤의 신음, 다그치는 말투의 일본어, 그리고 싫어, 싫어, 싫어! 이다.

너는 이 조선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까. 너를 만들고 기획한 건축가가 간사이 지방의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천만에. 금계동에 지어진 서대문형무소가 본래는 아연판을 덧댄 허술한 건물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것. 5만 엔의 공사비로 염가 자재만 골라 쓴 까닭을 생각해보기. 정말 우연히도 건축 감독직을 맡은 현장 관리자가 검소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던 탓이다? 잔인하면서도 명료한 사실 둘. 일인용 옥사 구조의 형무소 내실들은 판자만큼이나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지어졌을 듯. 그래야만 최대한 많은 기결수들을 나눠서 수감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에 더해 옆방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뒤척임조차도 잠을 깨우기에는 충분하다. 재소자들은 숙면을 이루지 못해 종일 신경과민에 시달린다. 시설 전체가 소음이 주는 부정적 영향과 병증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실이었던 것. 바로 이 감옥이 너의 선배이자 형제자매다.

시텐노 가즈마, 말하자면 너의 아버지는 이후 네 개의 형무소 설계를 다시 부탁받는다. 소음에 대한 그의 연구는 공사가 이어지면서 한층 정교해진다. 그는 재소자들의 수면질환을 부추겼던 1907년 서대문형무소 설계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한다. 1912년 천안형무소에는 높은 천장과 복층식 옥사가 도입되었고 층간 소음마저 만들어냈다. 1920년 부여형무소와 1924년 목포형무소는 취조실에 환기구 통로를 냈다. 심문관이 집은 고문 도구가 다양한 색채의 비명과 신음을 만들면, 이 음향이 배관을 따라 각 감방에 흘러드는 구조다. 마지막으로 1931년 김해형무소는 건물 전체를 유리 피막과 암면 격자, 세라믹으로 둘러싸기에 이른다. 더군다나 옥사 내부에 가구가 놓이지 않아서, 한 번 시작된 소음은 멎기까지 한참이나 울려 퍼진다. 너의 아버지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제국의 새로운 사업 담당자로 추대된다. 방위성과 과학기술청의 예산이 함께 출자된 건축물 하나를 올리는 것이다. 장거리 통신과 도청 장치, 암호해독 교본, 전파 교란 장비 따위를 연구하기 위한 비밀 연구시설을. 아마도 제국은 아시아 침략을 앞두고 정보전쟁의 징조를 예감했던 듯. 건축 계약을 마친 그가 총독부 복도를 또각또각 걸어 나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상상할 수 있다. 목소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 있다면! 뼈대를 상상해보기. 그래, 그건 바로 너였다.

경성군사통신연구소京城軍事通信硏究所. 너의 이름. 대외적으로는, 경성라디오기지국. 사실 그보다 자주 불린 이름은 니쿠야にくや. 우리말로 옮기면 푸줏간, 고깃간이다. 연구소 서기들에 의하면 형무소에서 송달된 녹취록들은 종종 살아 있다고 표현되곤 했으므로. 그 음성이 녹음된 현장을 상상해볼 것. 취조실 한쪽에 놓인 무뚝뚝한 합금 기계.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안테나는 초창기 마이크로폰 모델이다. 고문 과정에서 뒤따르는 갖가지 비명과 애원, 울음소리 모두를 빠짐없이 귀담아듣기 위해 고안된 듯. 이 소리들이 음성신호로 감지되면, 입력받은 전류의 패턴이 레코드판 위로 기록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축음기 바늘이 긁고 있는 음반은 사실 목소리 그 자체인 것이나 마찬가지. 이 끔찍한 음향 기록물을 실내악처럼 감상하는 연구자들. 이들은 음성 패턴을 줄무늬 모양의 그림으로 나타내는 데 몰두한다. 이외에도 음성의 크기가 음질을 떨어뜨리지는 않는지, 복잡한 음운 현상이 제대로 전해지는지, 인간 음성의 최소 음량과 최대 음량은 어디까지인지 같은 연구 주제들을 두루 점검해본다. 똑같은 음향신호인데 왜 어떤 소리를 만나면 두 배로 커지고, 어떤 소리를 만나면 두 배로 작아지는지 같은 수수께끼까지도. 육필 노트에는 음향이론 공식 몇 줄과 녹음장치의 인증 성능이 데시벨 단위로 적혀 있다.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일부가 손상된 조선말 욕설과 중언부언들은 통신용 암호 후보로 채택되기도 한다. 가령, 집에 보내조. 같은 식으로. 어마 보고 시퍼. [■]

이상의 녹음 내용은 건물 내부, 전선이 연결된 모든 스피커의 공명판을 떨게 하면서 거듭 재생된다. 해외 출장을 나갔던 연구팀이 건물로 돌아올 때까지. 일행은 출입구와 이어진 석면 복도에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본다. 지도교수가 제안서 파일을 던지며 외친다. 뭣들하고 있어! 당장 가서 방송 안 꺼? 연구실 조수들이 우르르 계단을 올라간다. 교수는 불안한 표정으로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사 둘을 가까이 불러다 말한다. 너희 둘은 이거 틀고 간 새끼 책임지고 찾아 와. 알았어? 박사들이 허겁지겁 복도를 벗어난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녹음 내용은 두어 번 더 방송된다. 방송실에 다다른 조수들이 서둘러 음향 장비의 전력을 끊는다. 녹음 파일은 방송실 PC 안에서 여전히 재생 중이다. 사본의 이름은 니쿠야.mp3. 조수들 가운데 한 명이 재생 파일을 정지시키자, 건물 곳곳의 스피커 채널에서 돌연 이런 음성이 흘러나온다. そうだよ。 私は覚えてるよ。 말하자면, 그래, 나는 기억해. 기계장비만으로도 충분히 비좁은 방송실 안에서 조수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서 있다.

한편, 병가를 핑계로 해외 출장에 결석한 단 한 명의 연구원은 다른 동료 박사들에 의해 자택에서 발견된다. 작은 단칸방은 기하학적인 도식의 낙서들로 빠짐없이 더럽혀져 있다. 현관의 전신 거울부터 수납장 가구 표면, 밋밋한 패턴의 벽지와 화장실 바닥의 백색 타일들까지. 사무용 책상에는 찻종이 몇 장이 머리가 뜯긴 채 흩어져 있었는데, 누군가 봉지 위에 마커 펜으로 아야와스카Ayahuasca라고 적어놓았다고 한다. 모니터 화면에는 여전히 프로젝트 이름이 떠올라 있다. “장거리 통신 환경에 따른 음성신호의 변질/왜곡 개선―박지형 박사” 하지만 프로젝트 파일 뒤에 가려진 웹사이트들은 연구와 관련된 보충자료라기보다 구한말 건축사 자료집에 더 가깝다. 특히 이미 오래전에 철거된 강점기 형무소 시설들의 사진과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그의 동료 박사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준다. 동료 박사들은 방 한쪽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려 앉은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졸업에 대한 조바심과 지나친 실적 압박이 또 한 사람의 영혼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듯. 남자는 비커에 갇힌 실험용 생쥐들처럼 공포의 사향을 뿜어낸다. 동료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는 시종일관 눈물 흘리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고맙습니다. 고맙씁니다. 고마씀니다…….

이제 어느 오후의 텅 빈 여객 열차 안이다. 용산행 노선을 따라 열차는 여수와 순천, 남원, 전주를 지나 대전을 통과하는 중이다. 객실 한쪽에는 젊은 여자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말끔하게 다림질된 검은색 정장 재킷 밑단이 좌석 옆으로 조금 흘러나와 있다. 콧등과 광대뼈에 걸쳐 있는 안경다리가 이따금 아래위로 흔들린다. 교정용 안경알에 맺힌 풍경은 실제 크기와 축척이 다소 어긋나 있는 모습이다. 예컨대, 새파란 하늘. 몇 점의 뭉게구름. 그리고 익은 곡식 줄기들로 노랗게 물든 추수철 경작지 같은 것들. 사실과 조금 다르지만, 일단은 그녀가 믿고 싶은 화면을 보여주자. 빗나가고 틀어진 모습의 세계가 외려 평온함을 준다면. 기꺼이. 한편, 시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그녀가 골라 집은 것은 책이다. 독서하는 인간의 제스처를 상상해보면 보통 두 가지. 양손으로 안전하게 책날개를 붙잡은 상태에서 좌우 페이지를 번갈아 읽어 내려가기. 또는 한 손으로 책 가운데―종이뭉치가 제본된 부분―를 눌러놓고 손가락을 조금씩 치워가며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이때 남은 손은 뺨 혹은 턱을 받치고 있을 것. 하지만 그녀는 지금 어느 쪽도 아니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다.

열차가 용산에 도착하자 그녀는 곧장 지하철로 갈아탄다. 경복궁역에 다다라 슬그머니 3호선 노선도를 빠져나온 다음, 모바일로 건네받은 약도를 따라 걷는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 단계다. 옥인동의 구시가지 입구에 이르러 그녀는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었네. 중얼거린다. 오래된 저층 가옥들이 벽돌식 담장을 맞대고 이어진다. 골목을 걷는 동안 머리 위에서는 은행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희미한 단모음 소리를 내며. 그녀가 그것을 똑같이 발음할 수 있다면, 아마도 스스스스…… 따위에 가까울 것. 중간중간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 마침내 도착한 곳은 커다란 비석 앞이다. 울퉁불퉁한 바윗돌 몸통에는 한자와 히라가나 자모음 일부가 남아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배낭을 내려놓는다. 해가 지는 시간이고 이제 석재 기념물 밑으로 비스듬히 그늘이 찾아온다. 그녀는 거기 어깨를 기댄 채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선배, 말씀하신 돌 앞이에요. 간단한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주변이 어두워진다. 그녀는 기념비로부터 한두 걸음 물러난다. 자기 앞에 놓인 말 없는 정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정확히는 파손된 비문의 내용을. 이들은 이미 옛날에 의미를 다 잃어버렸을 듯. 팔다리가 잘려나간 문자들의 몸뚱이를 되돌릴 수 있다면. 실종된 마디들을 스스로 추측하기. 그런 방법으로 그녀는 어쩌면 문장 몇 가지를 읽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불쑥 기념비 뒤에서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뭐해, 빨리 가자. 그녀는 배낭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제 영락없는 저녁이다.

둘은 기념비 뒤에 숨겨진 산책로를 걸어 올라간다. 스마트폰 뒷면에 달린 손전등 불빛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가까운 연못가의 수양버들 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 풀벌레의 늦가을 노랫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습기로 한층 들떠 있는 밤공기를 가득 채운다. 먼저 말을 붙이는 사람은 남자 쪽이다. 내가 알려준 책은 읽어봤어? 어둠 속에서 여자가 머리를 한 번 끄덕인다. 올라오는 기차에서 조금 읽었어요. 그러자 남자가 이야기한다. 그냥 기본적인 음향이론 책이야. 교수님이 자주 물어보시니까 외워놓는 게 좋아. 그리고 짧은 보폭으로 다섯 걸음만큼 침묵이 이어진다. 이번에 먼저 말을 붙이는 사람은 여자 쪽이다. 선배, 지형 선배 연구실 그만뒀다면서요. 대답이 없자 여자는 열 걸음쯤 더 가서 다시 묻는다. 사실이에요? 남자가 우뚝 멈춰서고 여자는 이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긴다. 이때 그들은 붉은 돌기둥과 연결된 철제 문짝 가까이 다다라 있다. 남자는 철문을 밀기 전에 짧게 대답한다. 어, 사실이야. 아르누보 양식의 오래된 주철 대문이 안뜰 방향으로 밀려나는 소리. 이 소음은 듣기에 너무 끔찍해서 일종의 음향 공습처럼 받아들여진다. 안뜰을 걸을 때 남자는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한다. 회사는 여기보다 더 힘들어. 이어서. 너희는 편한 줄 알아야 해. 정말로.

그러는 동안 어느새 둘은 육중한 벽면 앞에 이르러 있다. 그 위에 덧입혀진 도색 자국은 거의 공예에 가까울 만큼 두껍고 꼼꼼해 보인다. 한편, 납작한 표면에서는 흔해 빠진 외관 장식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여자는 스마트폰 조명을 머리 위로 올려본 다음에야 이 벽이 지상 3층 높이 건물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자는 카디건 주머니에서 직원증 하나를 꺼내다 내민다. 앞쪽에 끼워 넣은 정면 사진은 이력서나 학생증, 혹은 다른 휴대용 증명지의 일부로 사용되어왔던 이미지다. 여자는 사진 밑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읽는다. 김선영.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여기서 도대체 몇 명이나 망가져서 나갔어요? 멀쩡한 몸으로 그만둔 사람이 있기는 있나요? 남자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나타난다. 앞니와 잇몸에 고인 소화액이 빛을 받는다. 뒤따라 이어지는 말들은 푸르죽죽한 어스름 속에서 영상처럼 떠오른다. 난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할 거야. 취업하라면 취업하고. 옆에 있으라면 옆에 있고. 너도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홀로 남겨지자 선영은 안경을 벗는다. 움푹 꺼진 눈뼈가 떨려온다. 아니다. 뼈가 떨릴 수 있었던가. 떨리는 건 사실 눈꺼풀이 아닐까. 손가락 관절도 마찬가지. 안경다리를 쥔 손뼈와 힘줄들이 위태롭게 떨린다. 이때 불현듯 떠오르는 음악은 미국의 작은 레이블에서 발매된 디지털 앨범 속 소품이다. 사운드트랙의 이름은 Gas; 가스. 조용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잡음 몇 가지가 부분적으로 연속된다. 한 시간 길이의 타임라인 동안 계속. 이 곡의 음향신호를 줄무늬 모양의 그림으로 나타내 본다면 무척 친숙한 모양일 듯. 중얼거리는 인간의 음성신호와 닮았다든지. 그렇다면 어떤 말들은 언젠가 음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손을 떠는 여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내 인생은 망했고 앞으로도 망할 거야. 라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할 때, 단 한 순간, 그녀의 음성 파형이 수백 곡의 교회 아리아 가운데 한 소절과 정확하게 맞물린다면, 과연 누가 이것을 음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연구소의 문을 열면 어두운 복도 하나가 드러난다. 밝기가 부실한 조명기구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벽면이다. 이 오래된 석면 벽재는 물먹은 곰팡이 냄새를 풍길 뿐 아니라 유독성 부스러기들에 둘러싸여 있다. 무엇보다도 못질 자국 하나 없이 거의 공백에 가까워 보이는 표정. 관점에 따라서는 차라리 이죽거리는 것 같기도. 선영은 소맷부리로 입을 막은 채 통로를 따라 걷는다. 작은 독서실 크기의 방들이 일자형 복도 양옆으로 이어진다. 흡사 학교처럼. 출입문 바깥으로 저마다 실내 표찰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선영이 멈춘 곳은 1-13 표지 밑이다. 그리고 복도 한쪽에 쌓여 있는 마분지 상자 네 개. 사람 하나 높이에 이르는 짐들은 일종의 목록을 나타내는 듯. 예컨대, 한 사람 분량의 잔해라고 할지. 선영은 문 앞에 이르러 우뚝 걸음을 멈춘다. 옻칠이 다 벗겨진 적송 문짝은 과묵하고 문틀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여닫이식이다. 손잡이를 옆으로 당기자 단칸방 크기의 어둠이 드러난다. 불을 켜면 구닥다리 공학 연구실의 정경이 하나둘 뚜렷해진다. 내벽을 따라 나란히 놓인 여섯 개의 서가. 길쭉하게 마름질된 종려나무 책상이 U자로 이어진다. 그 위에 올라와 있는 물건들은 차례대로 아날로그 모니터, 더듬이 모양의 고주파 진동계, 투명한 전파 투과 장치와 고압 가스등, 유리창, 적외선 빔 따위의 실험용 매질들, 그리고 몇 권의 이론 실험 서적과 수상쩍은 종이 출판물, <세상에 없는 비밀 vol.4; 르 코르뷔지에는 어떻게 건축을 지배했는가―현대 건축법의 비밀>이다. 의자는 이 모든 집기와 장비들로부터 외따로 밀려나 있다. 바퀴가 다섯 개나 달린 그 가구는 틀림없이 연구실 비품 가운데 가장 젊은 축에 들 것. 뒤로 한껏 젖힌 등받이에서 예전 주인의 앉는 습관, 혹은 안쓰러운 척추질환 따위가 읽히기도 한다.

선영은 의자를 책상 가까이 밀어본다. 의자 다리 밑에 엉켜 있던 전선과 케이블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선영은 놀라서 손을 놓아버린다. 한 차례 들썩이는 연구실 집기와 장비들. 그리고 먼지구름. 기침 소리가 재차 튀어나온다. 캘룩캘룩.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뇌운 혹은 전자 스모그처럼 연구실 안에 떠오른다. 私の声が聞こえますか? 말하자면, 내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또 한 번. 私の声を聞けますか。 말하자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선영은 소리 없이 머리를 든다. 연구실 내부의 음향 설비를 찾는 듯. 그녀의 시선은 천장 한쪽 구석에 가서 머문다. 정확히는 그곳에 매달린 확성기 채널 쪽. 먼지 쌓인 공명판이 전기 펄서로 떨리는 중이다. 떨어져 내리는 보푸라기들. 저 목소리는 어디서 오는 건지. 간간이 노이즈가 포착되기도. 목소리가 말한다. ここから出なさい。 바꿔 말하면, 여기서 나가세요. 선영은 들은 내용을 의심한다. 한편, 시키는 대로만 하라던 사람이 있었지. 그래서 그녀는 곧장 그곳을 나간다. 목소리는 1층 복도, 가까운 음향 설비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때 선영은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켠다. 내장 사운드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음성신호들이 차곡차곡 저장된다.

もう1-1室に行ってください。

이제 1-1실로 가세요.

錠の暗証番号は2-1-6-3です。

자물쇠 비밀번호는 2-1-6-3입니다.

探すべき歌謡曲の名前は「宵待草」です。

찾아야 하는 가요의 이름은 「달맞이꽃」입니다.

ラベルで1912年6月1日、そして竹久夢二名前を探してください。

라벨에서 1912년 6월 1일, 그리고 다케히사 유메지라는 이름을 찾으세요.

余分のレコードを十七個持ってください。

여분의 레코드판을 열일곱 개 챙기세요.

もう1-3室に行ってください。

이제 1-3실로 가세요.

「宵待草」を再生させてください。

「달맞이꽃」을 재생시키세요.

2分54秒台の"て"部分だけを録音してください。

2분 54초대의 "테" 부분만 녹음해주세요.

録音された内容を3分の長さに伸ばして貯蔵してください。

녹음된 내용을 3분 길이로 늘여서 저장해주세요.

十七つのレコード盤に同一に。

열일곱 개의 레코드판에 동일하게.

それを箱に入れてください。

그것을 상자에 옮겨 담으세요.

もう地下1階に降りてください。

이제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세요.

階段の下に箱を下げておいてください。

계단 밑에 상자를 내려놓으세요.

あなたがすることは終わりました。

당신이 할 일은 끝났습니다.

もうここを去ってください。

이제 이곳을 떠나세요.

そして二度と戻らないでください。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일주일? 보름? 옥인동 구시가지 안으로 화물을 짊어진 군인들이 무리 지어 나타난다. 좁다란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 다니는 서른 벌의 군복과 군화 삼십 켤레. 말하자면 신발 속에 넣은 발바닥들. 제식 교본에 알맞게 훈련받은 한 가지 걸음걸이만이 무겁게 울려 퍼진다. 보행로 너비에 맞춰 한 줄로 늘어선 모습. 돌연 좁아지거나 늘어나는 앞뒤 간격 때문에 뒤꿈치, 또는 앞발을 밟힌 병사들이 잠깐씩 휘청거린다. 군모 밑에 가려진 얼굴 그늘에는 앳된 이목구비와 욕설을 견디는 입 모양이 여러 개. 행렬의 가장 앞줄에 선 남자는 외딴 기념비 앞에 이르러 군모를 벗는다. 앞부분에 바느질된 다이아몬드 계급장은 그의 신분을 드러낸다. 왜 계속 이 주위에서 맴도는 것 같지? 그가 투정하든 말든 병사들은 높다란 석조 기념물을 지그시 올려다본다. 은행잎으로 노랗게 물든 우듬지가 삼십 개의 두개골 위에서 흔들리는 소리. 이때 바윗돌 머리에 앉은 까마귀가 갑자기 까악 운다. 새가 날아가는 방향은 기념비 뒤편이다. 소위는 군모를 다시 쓴다. 아주 조심스럽게 바윗돌을 돌아서 간다. 그러자 호젓한 산책로가 그를 맞이한다. 길을 따라 다닥다닥 옮겨심긴 은행나무들이 이어진다. 바짝 마른 낙엽들이 흩날리는 중이다. 산책로를 걸어 올라가는 동안 원래 한 줄이었던 소대 대열은 둘, 셋, 다섯으로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마침내 군인들이 다다른 장소는 이름 없는 건물이다. 도로명주소나 옥외 간판은 물론 쓰임새를 짐작해볼 만한 일말의 표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입체 건축물. 아니면 바로 이런 해괴한 외관 자체가 하나의 표지가 아닌가 싶은. 병사들이 들고 있던 화물을 하나둘 내려놓는다. 따로 휴식 명령을 전달받지 않았음에도! 소위는 힐끗 뒤돌아본 다음 녹슨 출입문을 두드린다. 빨리빨리 강하게. 세 번. 쾅쾅쾅. 그러자 문 옆에 조그맣게 매달린 전자 기판에서 낯선 음성이 흘러나온다. 사령부에서 나오셨나요? 덮개 바깥으로 전기 회로 일부가 노출된 이 장치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소위는 물방울 모양의 외눈 렌즈 가까이 머리를 숙인다. 간단한 거수경례가 뒤따른다. 충성. 새로 임관한 김준서 소위입니다. 요청하신 물품들 가져왔습니다. 안에서는 한동안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윽고 문 뒤에서 다중 잠금장치가 하나둘 풀어지는 소리. 쇠붙이들이 돌아가면서 율동을 만들어낸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소위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이를테면 압운들, 즉 리듬의 털이다.

문을 열면 어두운 복도 하나가 드러난다. 그리고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오는 신발 소리. 안경 쓴 남자가 다가오며 고개를 까딱인다. 물건은 1-13연구실로 옮겨주세요. 거기가 지금 비어 있거든요. 남자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장소는 복도 맞은편이다. 소위는 문 옆에 서 있는 몇몇 병사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준다. 들었지? 이제 병사들이 줄지어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1-13연구실까지 도합 열일곱 개의 몸이 1층 복도 안에 나란히 늘어선다. 낱말과 낱말을 이어주는 보조사처럼. 느슨한 인체 사슬은 건물 바깥에 쌓인 화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잠시 후 앞줄에서 전달받은 보급품 상자가 하나씩 건물 안으로 옮겨진다. 병사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상자를 주고받는다. 다만 사이가 멀어서 상자를 살짝 던진다. 아주 살짝. 이쪽 병사 하나가 상자를 건네려고 팔을 쭉 뻗으면 저쪽 병사도 받기 위해 팔을 쭉 뻗는다. 그럼에도 닿지 않아 살짝 던지는 것이다. 상자가 공중에 혼자 있는 시간은 잠깐이다. 이 동작이 실시될 때마다 작은 기합 소리가 끼어든다. 병사, 헛, 하나가, 헛, 상자를, 헛, 집어, 헛, 던진다. 소위는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이목이 빼앗겨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다.

십 분 후. 일손이 멈춘 병사가 앞줄부터 한 칸씩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소대 하나 분량의 미확인 보급품이 1-13연구실 구석에 켜켜이 쌓이게 된다. 소위는 눈대중으로 한 번, 손가락으로 두 번 물품의 개수를 검사해본다. 수량은 송장 목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이제 복도로 나오면 병사들이 각자 서 있던 바닥에 쪼그려 앉아 휴식 중이다. 소위가 홀로 또각또각 복도를 걸어 나갈 때, 느닷없이 목소리 하나가 그들 가운데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病人, 気をつけ。 말하자면, 병사, 차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또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선다. 목소리는 통사 하나를 낭비 없이 발음할 줄 안다. 또 한 가지 특징으로는 차분하고 기품 있는 억양. 짧게 힘주어 말하는 조음 방식은 의장대 장교들의 화법을 따르는 듯. 또 한 번 구령이 떨어진다. やすめ。 바꿔 말하면, 열중쉬어. 열일곱 개의 오른쪽 다리 관절이 일시에 움직인다. 등 근육 위로 가져다 붙인 양쪽 손바닥도 마찬가지. 목소리가 気をつけ。 그러니까, 차려! 하고 외친다면, 빳빳한 군용 직물과 허벅지 살이 신속하게 마주쳐야 할 것. 소위는 부동자세를 지키느라 경직된 넓적다리들을 빠르게 번갈아 본다. 무시무시한 긴장감. 목소리가 말한다. 一列縦隊で―立。 그러니까, 일렬종대로―서. 이제 한 줄로 간격을 좁힌 채 붙어 있는 까까머리 열일곱 개. 앞사람과 뒷사람을 하나의 몸뚱이로 포개어놓는 이 열병 방식은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조직의 규율을 나타내는 듯하다. 목소리가 계속해서 명령한다. これから―行く。 바꿔 말하면, 앞으로―가. 이 구령은 병사들을 지하층으로 이끌고 간다. 혼자 남겨지자 소위는 군모를 벗는다. 납작하게 눌린 머리 가죽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 잃어버린 병사들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회한과 그리움의 색채를 띤 저 음성으로부터. 소위는 문 바깥으로 소리쳐서 야외에 남은 병사들을 불러 모은다.

지하와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아래층에서는 난데없는 공사 소음이 울려 퍼진다. 소위는 갖가지 날붙이와 연장들이 자르고, 내려찍고, 때리거나 부수는 팔들에 붙잡혀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파괴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느라 얼이 빠져 있는 인부들은 위층에서 잃어버린 병사들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출입구 앞에 붙들려 있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구령이 있었을 것. 못 박힌 문짝에서 나사 머리가 뽑혀 나간다. 손잡이에 감긴 쇠사슬이 끊어지는 소리. 문짝을 내려찍는 도끼질. 한편, 자물쇠 옆에 나란히 서서 영치기영차 톱을 켜는 병사 둘.

소위는 귀를 틀어막는다. 동시에 눈에 띄는 것은 무지막지한 크기의 지하층 로비다. 장소는 정신병원의 보호 병동이나 현대식 구치소의 격리 시설 같은 수감용 구역을 연상시킨다. 치밀하게 걸어 잠긴 철문들은 익명의 무기수들을 가두고 있는 듯하다. 너무나도 위험해서 영영 면회조차 금지된. 이때 가까운 문짝 하나가 큰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소위는 꿀꺽 침을 삼킨다. 자리에서 뜯어져 나온 철문 잔해들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에는 서로 다른 용적의 동물용 케이지들이 버려져 있다. 철근과 창살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뼈대만 남은 사체들이다. 커다란 철창 속에서 점잖게 앉은 채로 죽음을 맞은 좌식 백골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의 것이다. 오래전에 멸종된 시베리아호랑이를 한 마리 상상해볼 수 있다면. 낮게 으르렁거리는 울음소리와 씩씩거리는 숨소리도. 이 공포스러운 노래 밑에는 초저주파 음향이 깔려 있어서, 멀리 떨어진 당신의 몸뚱이마저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었던 모양이다.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케이지 옆에 놓인 서간체 연구 기록지가 그렇게 말한다. 한편, 천장에 매달아 놓은 여러 개의 새장에서는 왜가리과 조류들의 골격 잔해가 발견된다. 이들은 같은 종의 친척들처럼 멋진 다리는 가지지 못했지만, 목 관절만큼은 유난히 길게 발달했던 듯. 나중에 알락해오라기로 밝혀질 이 철새들은 앞서 17세기쯤 영국인 의사에 의해 사육된 이력이 있다. 이 호기심 많은 의학자는 “겉모양조차도 아주 희귀한 이 새가 어떻게 바순 소리와 비슷한, 자연 전체를 통틀어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저음을 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삼백 년이 지난 다음, 여기 지하 시설에서 다시 연구 목적으로 사육되었던 것이다. 소위는 새의 소리가 기보된 오선지 종이 한 장을 새장 속에 밀어 넣는다. 죽은 새는 반들반들한 이마와 부리를 흔들며 뮤지끄뮤지끄 노래하는 듯하다.

이때 바깥에서 다른 방의 문짝이 열린다. 소위는 경첩이 벌어지는 소리를 쫓아간다. 이번 철문은 멀쩡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붙어 있다. 다만 절단된 자리에 그대로 버려진 쇠사슬들을 병사들이 나서서 걷어찬다. 문을 열자 삭은 종이 냄새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다. 공중에 머물러 있던 보풀들도 함께. 소위와 병사들의 어깨가 기침으로 들썩거린다. 백 년 만에 면회객을 맞는 6단형 양철 선반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보면 선반 뒤로 또 다른 선반이 서 있는 모습. 얼마나 많은 받침대가 필요했던 건지. 이들 사이에 비워진 공간으로는 사람 한 명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다. 소위는 가장 앞줄의 선반 몇 칸을 거닐어본다. 용적이 비슷한 널빤지 상자들이 눈높이에서 이어진다. 상자 바깥으로 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는 물품들은 죄다 종이 모둠을 엮은 것이다. 두꺼운 나일론실로 제본되었고 말린 돼지가죽을 표지로 썼다. 소위는 반듯하게 포개어 놓인 서류철 하나를 공들여 빼낸다. 겉장에 찍힌 붉은색 인주 자국에서 아직도 미미한 악력이 전해지는 듯하다. 종이를 넘기자 어떤 서식이 눈앞에 나타난다. 다음 장에 오는 속지들도 양식은 같다. 대부분 한문인데 훈독하면 아래와 같이 읽을 수 있다.

※ 음성자료 제공자 명단

[0067] 이용갑, 42세, 의병, 스스로 혀를 자름.

[0068] 김예래, 17세, 학생, 학대로 인한 말더듬증.

[0069] 신원 확인 불가.

[0070] 오영옥, 19세, 학생, 기흉과 천식이 언어장애에 미치는 영향.

[0071] 이시카와 다이치, 30세, 변절자, 고문 과정에서 실어증.

[0072] 이성희, 7개월, 아기, 고주파의 울음소리.

[0073] 성낙윤, 68세, 민족운동가, 치아를 모두 뽑음.

[0074] 나가야마 쇼이치로, 18세, 남성 소프라노, 5세 때 거세됨.

[0075] 이우경, 23세, 국극 가수, 비교적 정확한 발음법.

[0076] 신원 확인 불가.

[0077] 이칠연, 24세, 의병, 너무 잦은 고문으로 유발된 성대 결절.

자료는 형무소에서 녹음된 채록 자료의 제공자들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잠시 뒤에, 소위는 이것을 서류철 사이에 되돌려놓는다. ―나중에 그는 이 판단을 두고두고 뉘우치게 된다― 방대한 기록과 이름의 무덤이 그의 뒤에 남겨진다. 빈손으로 걸어 나온 그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병사들이 수군거린다. 소대장님. 옆에 있던 병사가 묻는다. 이 건물은 원래 무슨 건물이었던 겁니까? 소위는 말없이 고개를 흔든다. 거부 혹은 부정형 문장에 관한 한 가장 너그러운 동작이 이어진다. 달그락거리는 두개골. 희곡 대본에 적힌 행동 지문을 따르는 것처럼. 소위는 이마를 자꾸 쓰다듬는다. 문지를수록 환해지는 어떤 기억이 있는지도 모른다. 간단한 보급 임무야. 또는, 전해주기만 하고 돌아오면 돼. 대대장은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군에서 후원 중인 연구기관이라는 것만 알면 돼. 이런 식으로. 소위는 긴 시간 동안 겨우 이따위 회상에나 잠긴 채 입술을 뜯는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우린 여기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여남은 병사들이 머리를 끄덕인다. 한편, 복도에서는 넋을 빼앗긴 병사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출처가 불분명한 레코드판이 한 장씩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이다. 얼빠진 표정과 걸음걸이들이 각자 다른 방들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흘러나오는 콘트랄토의 음성. 가사는 단조로운 편이다. 단모음 [ㅔ]가 전부인 노래. 오래된 음향 장치에서 재생되는지 이따금 잡음이 섞인다. 음량은 점점 커져서 정신 나간 병사들을 깨우고 돌려보낸다. 복도 곳곳에서 병사들이 허겁지겁 뛰쳐나온다. 착란에 시달린 열일곱 명의 병사들은 복귀 후 단체 면담 시간을 가지게 된다. 오후 한두 시간 동안 벌어진 이 초자연적인 소동에 덧붙여, 병사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들었다고 입을 모아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간사이 억양의 일본어를 어떻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는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兵士たちは階段を下りる。

병사들은 계단을 내려갈 것.

0-01部屋で延長と工具を探して聞いていること。

0-01방에서 연장과 공구를 찾아 들 것.

地下の全施設への出入り口を開放すること。

지하의 모든 시설 출입구를 개방할 것.

階段の下に置かれた箱を探すこと。

계단 밑에 놓인 상자를 찾을 것.

レコードを一つずつ分けてかかる。

레코드판을 하나씩 나눠 들 것.

蓄音機が置かれた十七の部屋を訪れる。

축음기가 놓인 열일곱 개의 방을 찾을 것.

レコード版を円盤に差し込むこと。

레코드판을 원반에 끼울 것.

蓄音器を作動させること。音量は最大で。

축음기를 작동시킬 것. 음량은 최대로.

もう逃げろ, ちびれ。 逃げろ。

이제 도망쳐라, 꼬마들아. 달아나라.

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설경보가 발효된 어느 11월 오후. 난데없이 화재경보가 울린다. 건물 3층 숙직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박사 둘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주고받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오로지 조급한 몸짓들만. 박사들은 건물 바깥에서 비로소 숨을 고른다. 긴급신고센터로 전화를 거는 박사는 안경을 쓰지 않은 쪽이다. 그러나 다른 박사가 귓가에서 전화기를 낚아채 간다. 테 없는 안경을 쓴 그 남자는 연결 신호가 끊기기를 잠자코 기다렸다가 무섭게 소리친다. 미쳤어? 연구소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 이어서, 시원하게 폭파되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 거야? 강점기 건물들 해방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몰라? 후배 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럼 어떡해요. 불났다는데. 안경 쓴 남자가 피식 웃는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러는 거야. 기다리면 알아서 꺼져.

결과적으로 박사의 말은 정확하다. 건물 내부의 어떤 장소에서도 화재 징후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보음이 실내에서 사람을 비워내기 위한 속임수였다는 사실은 오직 건물만이 알고 있다. 홀로 남겨진 모처럼의 시간. 아주 짧은 한때. 실내에서는 어느 순간 사이렌 소리가 멎는다. 하지만 바깥에서 기다리는 박사 둘은 이것을 알 도리가 없을 듯.

이제 건물은 안팎으로 적막해 보인다. 남아 있는 소리는 하나뿐이다. 어둡고 넓은 지하층 로비 안에 울려 퍼지는 단음절의 노래. 녹음된 음성의 가느다란 떨림을 건물은 가만히 듣고 있는지도. 이 합성 사운드는 20세기 초, 본토에서 작곡된 유행가의 소절 일부를 누군가 고의로 늘린 것이다. 건물의 지하 시설 안으로 풍부한 음량의 주파수가 일정하게 이어지도록.

소리를 전달하는 매체는 열일곱 개의 축음기. 그래, 금관악기의 주둥이를 모방한 거대 확성기. 어두운 시기에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실내악을 들려주었던 기계장치들이다. 불현듯 호명되는 건물의 이름. 니쿠야. 니쿠야는 그때 그 음악의 목록을 기억하는지? 이를테면 목청이 찢어지는 비명, 고통이 지나간 뒤의 신음, 다그치는 말투의 일본어, 그리고 싫어, 싫어, 싫어! 같은 음성신호들을.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そうだよ。 私は覚えてるよ。 말하자면, 그래, 나는 기억해. 이 짧고 귀한 시간, 목소리는 슬픔에 사무치거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다. 혹은 이 땅의 자연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자신의 역사를 나름대로 곱씹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는다. 다만 회한과 그리움의 색채를 띤 간사이식 일본어로 수차례 중얼거릴 뿐이다. 私は覚えてるよ。 나는 기억해. 私は覚えてるよ。 나는 기억해.

한편, 건물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메가헤르츠 크기의 노래. 지상의 각 층과 연구동 시설들을 떠받치고 있는 철근 기둥들이 미세하게 떨린다. 녹음된 음성의 주파수와 콘크리트 건축재의 자연 주파수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니쿠야. 니쿠야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지?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작은 흔들림. 경미한 지진 정도면 완벽할 것. 혹은 태초의 말씀 같은. 건물은 어떤 징조를 기다리는 듯하다. 마치 이 순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몇 분 뒤에,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이를 지켜보는 박사 둘.

오늘날 종로구 옥인동 고궁 주위에서 길을 잃은 당신을 상상해보기. 아마도 당신은 우연한 경로를 지나 외딴 기념비 앞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지들이 머리 위에서 흔들린다. 발밑에서는 마른 나뭇잎과 열매껍질들이 바스락바스락 밟힌다. 비석은 옛날 인왕산 일대에서 숭배되던 선바위를 떼어다 옮긴 것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운반 당시의 채석용 끌 자국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울퉁불퉁한 바윗돌 몸통에는 한자와 히라가나 자모음 일부가 남아 있다. 당신은 당신 앞에 놓인 말 없는 정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정확히는 파손된 비문의 내용을. 팔다리가 잘려나간 문자들과 같이, 한때 기념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석조 기념물은 다만 과묵하다. 해가 지는 시간이고 이제 영락없는 저녁이다. 당신은 한겨울 추위로 코를 훌쩍인다. 당신은 기념비 앞을 떠나버린다. 이따금 당신이 부는 휘파람 소리. 성부가 하나뿐인 그 노래는 일면 쓸쓸하고 외로운 구석이 있다. 어느 아이돌 그룹의 유행가 멜로디를 흉내 내는 걸까. 기억도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모놀로그 또는 아리아와 같은.

 www.hankookilbo.com/News/Read/201912241170357779

[2019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당선작/심사평/소감 확인 : www.hankookilbo.com/Series/S-PLANNING-SP-33-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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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당선작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 노혜진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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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두 살에 뽀얀 속살입니다 시야각으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 벗고 만날 수 있고 온몸을 훑고도 괜찮아요 엄마는 때수건과 우유를 손에 들고 옵니다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두꺼운 발톱과 무좀을 병이라 부릅니다 탕의 수증기는 소리와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그 발톱으로 네일 숍에 왔대” 동료들이 웃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엄마 얘기만 합니다 아빠 얘기만 하는 동료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없니?” 질문은 되돌려집니다 알고도 모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동료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아차 하면서 재채기처럼 웃었습니다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만큼 웃음거리들이 쉽게 배어나오는 회사입니다 제가 오늘 재채기를 했던가요

바디 클렌저에서 수영장 냄새가 납니다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떠오릅니다 카페 화장실 앞에서 스콘을 먹어야 했어요 열고 닫히는 문은 섬이었다가 여름이다가 코끼리였습니다 삼십 분 동안 읽었는데요 시 한 편을 오래 보았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책을 동료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쓰는 몰입을 알 리 없어요 동료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등단을 못 하겠구나” 엉뚱한 발언을 잘 하는 저의 별명은 소설가입니다 “시를 씁니다” 말하지 않아요 동료들은 알고도 모르는 것일까요

“친구들은 어때요?” 하면 엄마가 떠오릅니다 저의 벗입니다 같은 원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 같은 구두를 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서로에게 선물합니다 기억이 풍성해지면 쪼그라드는 현재들 진짜 벗들은 기억의 원 안에 있어요

항공사가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엄마는 키위를 반으로 자릅니다 포도를 씻고 귤을 깝니다 키위의 씨만큼 늘어나는 의혹들 과일 열한 통을 들고 출근합니다 회사일까 집단일까 궁금합니다 급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과일은 엄마에게 달아 두는 외상입니다

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 살에 꾸었던 꿈의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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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당선작 ’어느 날 거위가’ - 전예진 당선자(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226157475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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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나가고 없었다. 거실 바닥에 놓인 물을 병째로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에서 알코올 냄새가 났다. 소주 한 잔 정도가 남은 참이슬 병을 주머니에 넣고 홍삼 팩을 입에 물었다.

가게 앞에 서자 유리문 너머로 홀에 앉은 아내가 보였다. 일곱 테이블밖에 없는 홀이 휑했다.

없는 손님도 쫓겠다.

문을 열며 말했다. 아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를 지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본사에서 온 절단육 상자가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상자에 담긴 스무 마리의 절단된 닭도 비닐봉지에 포장된 그대로였다. 가뜩이나 좁은 주방이 상자로 발 디딜 틈 없었다.

뭐 했어?

답이 없었다. 아내는 지역 채널 뉴스를 보고 있었다. 홀에 걸린 티브이에 강청호가 나왔다. 쓰레기와 썩은 갈대가 호수에 떠다녔다. 산책로를 지나는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어제부터 수 번은 본 뉴스였다.

장사 안 할 거야?

다시 물었다. 아내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검은빛이었다. 가끔 그녀의 눈은 그렇게 어두운 밤에 뜬 달처럼 보였다. 결혼 전 어느 호프집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날이 떠올랐다. 한때는 몇 시간이고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거 봐. 아내가 시선을 돌렸다.

아나운서의 오른쪽 위에 ‘외출·외박·면회 금지’라는 제목이 보였다. 강청군 인근 부대에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장병이 잇따라 나타났다. 군은 문제의 원인과 전염성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장병들의 외출과 외박, 면회를 사실상 금지했다. 아나운서가 뉴스를 전했다.

휴대폰으로 인근 부대의 금지령을 검색했다. 오늘의 유머와 루리웹 게시글이 몇 개 떴다. 내용은 모두 같았다.

<강청군 사건의 비밀>

글 내용상 자세히 말하긴 어렵지만 강청군 근처 부대와 매우 밀접한 사람임.

최근 *사단, *군단에서 외출·외박·면회 금지된 거 아는 사람은 알 거임. 근데 이게 단순한 질병 문제가 아님.

먼저 병장 한 명이 훈련 중에 오한이 든다며 떨다가 생활관에 돌아가자마자 쓰러짐. 침을 흘리고 먹은 걸 다 토했다고 함. 입 주변에 버짐이 피고 온몸에 하얗게 각질이 일어남. 일단 직할 의무대에 격리하고 지켜보는데 잠깐 사이에 사라짐.

며칠 뒤에 같은 사단 다른 연대에서 한 일병이 같은 증상을 보이더니 마찬가지로 없어짐. 조사 결과 둘은 접촉한 적 없음. 둘 다 탈출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CCTV에도 안 찍혀서 사실 탈영이라기에도 애매함. 군에서도 탈영으로 생각하고 조사했는데 밖으로 나간 흔적이 없어서 고심 중.

소름 끼치는 건 *사단에서 2명, *군단에서 1명 총 세 명이나 같은 증상을 보이고 말 그대로 증발하다시피 사라졌는데 무슨 병인지, 왜 그런 건지 모른다는 거임. 언제 또 누가 걸릴지 알 수 없음.

올리고 잡혀갈지도. 후속 글 없으면 누가 신고해주면 고맙겠음.

그럴듯한 개소리였다. 커뮤니티 글 외에 문제의 질병을 기립 저혈압으로 추정하는 기사도 있었다. 아내가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기립 저혈압이라는 게 있어? 주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에게 물었다.

주방에서 양동이를 바닥에 던지는 소리, 양동이에 절단육을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동이가 둔탁하게 달그락댔다. 아내는 장갑을 끼고 가위를 집어 들었을 것이다.

주방으로 몸을 돌리는데 시야가 흐릿하고 어지러웠다. 새벽에 마신 술이 올라왔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면 군인과 면회객으로 가게가 가득 차기 마련이었다. 시끄러운 홀을 지나 주방으로 다가가면 이따금 아내의 휘파람이 들리기도 했다. 입을 오므리고 입김을 부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지금은 주말이면 오는 아르바이트생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일과 다를 게 없었다.

강청군의 식당과 상점은 대부분 군인과 면회객이 오는 주말에 수익을 냈다. 군인들의 외출, 외박에 면회까지 막힌다면 시내에서 먼 우리부터 손해를 볼 게 뻔했다. 지난달에도 겨우 적자를 면한 참이었다. 매일 치킨을 튀기고 배달하지만 수중에 남는 돈이 없었다. 이 년 전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가 악몽처럼 떠올랐다. 석 달 동안 천만 원가량 적자를 봤다.

괜찮아. 우리 좋아지고 있잖아. 아내에게 말했다.

닭의 뼈와 내장이 가윗날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벨이 울렸다. 서둘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양념이랑 후라이드 하나씩에 와사비 간장 치킨이랑 고구마튀김도 시킬게요.

와사비 간장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단종될 위기에 놓인 메뉴였다. 더욱이 와사비 간장과 고구마튀김을 함께 주문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인중이 유독 튀어나온 얼굴을 떠올렸다. 아내와 나는 그를 와사비라고 불렀다.

부대에서 주문해도 되는 거예요? 와사비에게 물었다.

허락받은 겁니다. 그가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뒤로 돌자 주방에서 나온 아내가 보였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낀 그녀에게서 생닭 냄새가 났다. 지난 이 년간 우리에게 스며든 그 냄새에 속이 메슥거렸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물과 치킨 파우더를 붓고 반죽을 만들었다. 할 일이 많았다. 주문을 세 마리나 받다니 어려운 가운데 뭔가 해낸 느낌이었다. 소스 만들기가 좀 번거로우면 어떤가. 인중이 불거져 나온 와사비와 와사비 간장 치킨을 단종하지 않은 본사에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부대로 가는 길은 익숙했다. 주말이면 하루 몇 번은 오가는 길이었다. 길가에 깔린 낙엽과 볼에 닿는 찬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이번이 기회가 될지 몰랐다. 금지가 풀리면 연말 특수와 겹쳐 매출이 몇 배로 뛸 수도 있었다. 매일 가게에 묶여 있으니 시야가 좁아졌다. 이맘때는 전어에 소주가 딱인데. 중얼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주말이니까 홀 손님이 조금은 올지도 모른다. 참이슬 병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주의 감촉이 그리웠다.

열두 시가 조금 넘어 부대 후문에 도착했다. 와사비가 치킨을 받고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 드려야죠?

와사비가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잘근거렸다.

아저씨. 와사비가 입을 가리고 소곤댔다. ……가져가실래요?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며 그를 쳐다봤다. 와사비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뭐요? 카드단말기를 전대에 넣고 그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장에 가려 무엇이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왼쪽 초소에 앉은 초병을 곁눈질했다. 그가 무관심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오토바이를 끌고 오른쪽으로 걸었다. 초소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갔을 때 나지막한 욕설과 꺽꺽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담장 위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거위가 날아왔다. 원형 철조망 위로 꽤 높이 떠 오른 거위는 보도 턱 위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목에는 얼룩무늬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거위가 나를 보며 몸을 낮추더니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멀어지는 거위를 멍하니 지켜보는데 담장 너머에서 또 다른 거위가 날아왔다. 역시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저기요. 와사비를 불렀다. 담장 저쪽에서 흙길을 달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한낮의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덩치가 큰 거위가 목울대를 부풀리며 울었다. 거위는 성인 네 명이 나눠 먹어도 좋을 만큼 몸집이 컸고 좋은 환경에서 사육된 것처럼 윤기가 났다. 거위를 잡아 배달통에 넣고 가게로 향했다. 뚜껑을 열어두고 거위가 나오지 못하도록 통을 끈으로 여러 번 묶었다.

아내는 치킨값을 제대로 받았는지부터 궁금해했다. 영수증을 보여주자 그제야 거위를 살폈다.

거위치고는 크지 않아? 내가 물었다.

외래종인가 보지. 아내가 휴대폰을 집어 들며 툴툴댔다.

거위 앞에 쭈그려 앉아 목에 묶인 손수건을 풀었다. 손수건이 풀리면서 종이쪽지가 떨어졌다.

고든 램지가 추수감사절 특집으로 요리하는 영상도 있네. 외국 거위가 육즙이 좋대. 아내가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곧 추수감사절이라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종이쪽지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2소대 1분대 병장 장준태. 멀리 풀어주세요.’

주인이 있는 것 같아.

군인인데? 아내가 물었다.

우리는 의논 끝에 가게 뒷문 옆, 주차장 한쪽에 거위를 묶어놓았다. 아무 데나 똥을 싸고 날개를 흔들어대는 통에 가게 안에 둘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 정리하는데 전화가 왔다. 가게를 소개하고 주문을 기다렸지만, 상대는 말이 없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먹었어요? 그가 물었다.

뭘요?

장 병장님이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구요?

장준태요. 그 새끼가 변한 거예요. 분명히 봤어요.

작고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고개를 들어 주차장 쪽을 바라봤다. 벽 너머로 거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 같아도 안 믿지, 시발. 와사비가 욕을 지껄였다.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왜 욕을….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정신 나간 자식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해줄까. 그렇게 얼마 없는 단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예, 다음에도 시켜주세요. 솟아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상냥하게 말했다. 와사비가 전화를 끊었다.

누구? 아내가 물었다.

와사비.

뭐라는데?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전했다.

그걸 듣고 있어? 아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여튼 속도 좋아.

주문 알람이 울리고 단말기에서 접수증이 나왔다. 근처 주택이었다. 30분 후에 도착한다는 안내를 보낸 뒤 아내가 미리 튀겨놓은 닭을 다시 기름에 넣었다.

새벽 두 시까지 배달만 열 건이었고 홀 손님은 없었다. 와사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마리를 시켰다. 적자를 면하려면 하루에 열네 마리는 팔이야 했다. 평일 매출을 생각하면 그 열 배를 팔아도 모자랐다.

남은 치킨을 데워서 테이블에 놓았다. 두 마리 양이었다. 아내가 입맛이 없다며 일어섰다. 나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닭이 아까워 다리를 집어 들었다. 후라이드는 싫었지만 소스값을 생각하면 양념을 묻힐 수 없었다.

쟤 밥은 줬어? 아내가 물었다.

아까 양배추 줬는데.

데려오기만 하면 다지. 아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뒷문이 열리고 거위가 난동을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스테인리스 그릇이 뒤집히고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거위가 홀에 나타났다. 나는 일어서서 무릎을 굽히고 손을 가슴께로 올렸다. 여차하면 거위의 목을 낚아채야 했다. 거위가 몸을 부풀리며 부리를 여닫았다. 동그란 거위의 눈에 광기가 스쳤다. 거위가 목을 뻗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주황빛에 거무스름한 혹이 돋아난 부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닭 다리를 놓고 몸을 돌려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문에 단 풍경이 댕그랑댔고 거위가 푸드덕대는 소리가 풍경 소리와 뒤섞였다.

손잡이를 쥐고 온몸으로 문을 막았다. 유리문 너머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는 아내와 치킨이 놓인 접시에 부리를 박는 거위가 보였다. 거위가 목을 부르르 떨며 닭 다리를 집더니 고개를 젖혀 입에 넣었다.

문을 열고 거위에게 다가갔다.

얘 왜 이래? 아내가 물었다. 고기 먹어도 돼?

거위가 목을 바닥으로 내리더니 컥컥댔다. 거위의 목덜미를 잡고 부리를 벌렸다. 거위가 날개를 펼치며 버둥거렸다. 입안 끝에 두툼한 다리 살이 보였다. 닭 다리를 잡아 뺐다. 거위가 나를 보며 나지막이 울었다. 그네가 삐거덕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애가 칭얼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내를 흘금거렸지만,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나와 거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지못해 닭 다리의 살을 발라 거위에게 건넸다. 거위는 닭 다리에 붙은 살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아내가 기름이 묻은 내 손과 거위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잖아. 거위가 닭을 먹는다는 게. 그녀가 말했다.

거위는 원래 잡식이야. 내가 대꾸했다.

아내는 주방 입구에 서서 나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가게를 나섰다. 올해 초부터 반복되는 생활이었다. 아내가 가게를 열었고 내가 뒷정리를 했다. 이제 함께 보다는 각자 일하는 게 편했다.

거위는 순식간에 치킨 두 마리를 먹어치웠다. 거위의 입가에 기름기가 흘렀다. 홀 한쪽에 상자 두 개를 놓고 거위를 불렀다.

야. 닭 다리. 여기서 자라. 여기서 싸고.

거위가 두 상자를 들여다보더니 그중 하나에 들어가 앉았다.

주방을 청소하고 정산까지 끝내고 나니 거위는 부리를 날개에 파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치킨집에서 거위를 키우는 광경도 그렇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 손님이 없으니 병에 따라 모을 소주도 없었다. 주머니에 넣었던 참이슬 병은 아침 그대로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소주를 홀짝이며 유튜브 영상을 봤다. 거위를 키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다. 주인의 뒤를 따라다니던 거위 네 마리가 낯선 사람을 공격하는 영상을 보다 잠이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었다. 감각이 둔해질 정도로 얼굴이 부었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내의 목소리 너머로 거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온통 똥이야. 그녀가 말했다. 물기나 하고 이 거위 새끼.

실눈을 뜬 채로 홍삼 팩을 입에 물었다. 거위 새끼 아니고 닭 다리 새끼야. 내가 웅얼거렸다.

술 안 깼니? 얼른 오기나 해. 아내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피곤했지만 웃음도 나왔다. 아내와 이렇게 실없는 말을 주고받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내는 닭 다리를 키우자는 말에 나를 흘겨봤지만, 자정이 다 되도록 거위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 않았다. 저녁 배달이 한차례 끝나고 아내와 홀에 앉아 스테인리스 양동이에 담긴 물을 들이켜는 거위를 구경했다.

먹지 말고 키우자. 쟤 얼굴 작은 게 너랑 똑같잖아. 내가 말했다.

뭐가 똑같아. 아내가 손을 저으며 실소했다.

아니 진짜. 나는 물 마시기를 멈추고 우리를 빤히 올려보는 닭 다리를 가리켰다. 뭔가 말하려는 것 같지 않아?

닭 다리가 꽥꽥댔다. 봐봐. 먹지 말라네. 내가 덧붙였다.

배고픈가 보지. 아내가 일어나 주방으로 움직였다.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닭 다리에게 손을 뻗었다. 닭 다리가 부리를 소매 안에 파묻었다. 이런 앨 어떻게 먹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닭 다리는 가게에 남은 양배추도, 아내가 편의점에서 사 온 샐러드와 과일도 먹지 않았다. 기름에서 튀김 부스러기를 건져내 닭 다리에게 주었다. 닭 다리가 거름망에 담긴 부스러기를 허겁지겁 쪼아 먹었다.

사람한테도 안 주는 걸 동물한테 주면 어떡해. 아내가 질색했다.

다른 걸 안 먹는데 어떡해. 주방을 돌아가 부스러기가 더 없나 살폈다. 새카맣게 탄 게 대부분이었다. 쓰레기도 처리하고 얘 먹고 싶은 것도 먹이고 좋잖아. 내가 말했다.

어제는 양배추도 먹었잖아. 아내가 나를 따라와 말했다.

고기 맛을 본 거지. 내가 대꾸했다. 우리도 채소보단 고기가 좋잖아.

아내가 양배추와 과일을 섞어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았다. 배고프면 먹겠지. 그녀가 바닥에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 한 시가 가까워졌다. 주문은 없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아내와 나는 티브이와, 샐러드를 앞에 두고 입맛만 다시는 거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보. 아내를 불렀다. 소주 한 병만 깔까?

아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운전은?

걸어가면 되지. 연애할 때처럼. 내가 대답했다.

아내가 무엇이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콧바람을 내는 모습이 화가 난 듯도 했고 웃는 듯 보이기도 했다.

조금만 마시자. 소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기어이 까는구나. 아내의 입에서 작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술 때문이 아니라. 황급히 말했다. 같이 얘기한 지도 오래됐잖아.

오늘 몇 마리 팔았는데. 그녀의 눈이 날카로웠다.

배달만 다섯 건 했잖아. 홀도 몇 팀 받고.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매출이 적은 게 내 탓도 아닌데 왜 그녀가 따져 묻고 내가 주눅이 드는지 억울했다.

아내가 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모든 감정을 억누르겠다는 듯 눈을 깔고 얼굴을 돌렸다. 아내를 따라 일어나는데 테이블이 흔들리더니 소주가 넘어졌다. 곧바로 잡아 들었지만, 테이블에 소주를 조금 흘렸다. 아내가 나를 돌아봤다.

그래서 어쩌자고? 죽상으로 앉아있을까? 목소리가 커졌다. 기분 좀 풀자는 거 아니야.

지금 네가 화낼 상황이야? 아내가 소리쳤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문제는 가게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네가 하는 게 뭐 있어? 기껏해야 손님들이 남긴 술 모아 마시는 것밖에 더해?

말조심해. 아내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 나가던 아내가 내 옆으로 무엇인가를 곁눈질했다. 왼쪽 테이블에서 무엇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닭 다리가 머리를 쳐들고 무엇인가를 삼키고 있었다.

뭐야? 급히 주변을 살폈다. 얘 뭐 먹어? 소주 뚜껑은 테이블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저거 마신 것 같은데. 아내가 테이블에 흘린 소주를 가리켰다.

닭 다리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나와 비틀거렸다. 날개를 조금 들어 올리고 옆으로 걷는 모습이 춤이라도 추는 듯 보였다. 닭 다리는 한 바퀴를 그렇게 돌다가 앞으로 넘어졌는데 계속 몸을 일으키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니까 왜 소주를 까서. 아내가 언성을 높였다.

이게 그렇게 욕먹을 일이냐? 나도 맞받아쳤다.

그아하.

말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목을 늘어트린 닭 다리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울었다. 그아하.

아내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꿈틀거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만해? 아내가 키득거렸다. 진짜 사람 같잖아.

아내를 따라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카운터 아래 있는 손수건과 종잇조각이 떠올랐다. ‘분명히 봤어요.’ 와사비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닭 다리는 추수감사절을 무사히 넘겼다. 아내가 조리 방법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거위 구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닭 다리에게 그날그날 홀 손님이 남긴 치킨과 튀겨놓고 남은 치킨을 주었다. 닭 다리는 먹는 양이 늘면서 닥치는 대로 먹었고 하루가 다르게 살이 쪘다.

군의 금지령은 두 주 뒤에 해제되었다. 같은 증상을 보이는 병사가 더 나타나지 않았고 원인균을 지닌 거위를 부대 근처에서 잡았기 때문이었다. 군은 문제의 질병에 전염성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아내와 나는 급하게 홀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다.

토요일이 되자 오픈 시간부터 배달 주문이 줄을 이었고 홀도 반이 찼다. 부대로 배달을 갔다 와 가게에서 새로운 치킨을 싣고 다시 부대로 향했다. 가게에 들를 때마다 손님 수를 헤아렸다. 대부분 반 이상이 차 있었고 일곱 테이블이 모두 찼을 때도 많았다. 오토바이를 타며 하루 매출을 계산했다. 계산대로라면 하루 매출로 한 주 매출을 메울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배달이 조금 뜸해진 네 시 이후였다. 종일 주방에 있던 아내는 기름 냄새를 내보내기 위해 점심 이후로 뒷문을 열어두었지만, 홀이 워낙 붐비고 어수선해 주차장의 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한번 앉지도 못할 정도로 바빴던 날이었다. 아내는 반죽을 만들고 닭을 튀기고 부족한 소스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차례 배달을 끝내고 가게에 도착한 나는 헬멧을 벗기 무섭게 1번 테이블에 물통을 가져다주었다. 홀은 외출을 나와 복귀를 앞둔 군인들로 가득했다. 일곱 테이블의 서빙과 주문 전화를 도맡은 아르바이트생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꾸만 새 소리가 나요.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그의 말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오리 소리요. 닭 소린가? 손님들이 계속 물어봐요.

그제야 주차장에 있을 닭 다리가 생각났다. 주방으로 향했다.

쟤 점심 줬어?

뭐? 아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되물었다.

닭 다리. 뭐 줬어?

아내가 미간을 펴고 눈을 크게 떴다. 뒷문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문을 내다보자 부리를 벌린 채 고개를 숙인 닭 다리가 보였다. 닭 다리는 내가 다가가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깃털이 달린 짐볼처럼 부푼 몸뚱어리에 허벅지만큼 두꺼워진 머리와 목을 내려다봤다. 목 아래에 깃털이 빠져 살이 드러나 있었다. 붉은 살결이 익히지 않은 닭 같았다. 목줄 가장자리에 부리로 짓누른 자국이 보였다.

줄을 풀었다. 닭 다리는 기다렸다는 듯 주방을 지나 홀로 내달렸다. 군인들과 아르바이트생의 비명과 욕설이 들렸다. 홀로 나가자 7번 테이블에 앉아 치킨을 집어 드는 닭 다리가 보였다. 7번 테이블의 군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군인도 몇 명 보였다.

뭐야 이게? 7번 군인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아르바이트생과 모든 군인이 나를 바라봤다. 입이 말랐고 식은땀이 났다. 닭 다리를 바닥으로 떨어트린 뒤 발길질하는 시늉을 하며 밖으로 몰았다. 닭 다리가 몸을 부풀며 내게 맞섰다. 평소보다 몸집이 커 보였고 눈가가 충혈된 듯 빨갰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웬 거위가 들어오네. 큰 소리로 말하며 아르바이트생에게 7번 테이블을 정리하고 치킨을 새로 갖다 주라고 시켰다. 문밖에 선 닭 다리가 이마와 윗부리를 유리문에 대고 가게를 들여다봤다. 주황색 부리에 돋아난 검고 볼록한 반점이 섬뜩했다.

가게 밖으로 나가 닭 다리를 잡아 들었다. 닭 다리가 몸부림치며 발톱으로 손등과 팔을 할퀴었다. 점퍼 소매가 찢어졌고 손등에서 난 피가 소매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닭 다리의 무게에 무릎이 절로 구부러졌다. 옆 골목까지 걷다가 모퉁이를 돌아 주차장으로 갔다.

닭 다리를 던지듯 내려놓고 목에 줄을 둘렀다. 닭 다리가 머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부리가 어깨까지 올라왔다.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주변에 상자를 쌓아 올렸다.

울부짖는 닭 다리에게 7번 테이블에서 뺀 치킨을 던져줬다. 그릇에 머리를 넣었다 빼는 모습이 며칠은 굶은 것 같았다.

작작 좀 먹어라.

닭 다리가 눈을 치떴다. 반쯤 가려진 눈에 날이 서 있었다. 손등이 쓰라렸고 소매가 축축했다.

무슨 일이야? 아내가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뒷문을 소리 나게 닫고 행주에 물을 묻혀 손등을 감쌌다. 화가 치밀었지만 함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사진을 찍던 군인들이 신경 쓰였다.

주방에서 나와 아르바이트생에게 말을 걸었다. 홀이 소란스러워서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신고했어야 했나? 그런 거는 처음 봐서.

하셔야죠. 아르바이트생이 대답했다. 군대에서도 거위를 잡았다잖아요. 병 걸린다고 하던데.

뉴스에서는 원인이 된 거위는 살처분했고 전염병도 아니라고 했는데 그가 뉴스를 어디로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향한 군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배달이 들어와 가게에 붙어있을 시간이 없었다. 주문이 들어오는 것은 좋았지만, 닭 다리가 신경 쓰여 괴로웠다. 거위가 가게에 있다는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군인이고 면회객이고 아무도 우리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이 퇴근하는 여덟 시가 지나 새벽 한 시에 마지막 손님이 나갈 때까지 닭 다리가 가게로 들이닥치는 일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 내가 말했다. 우리는 가게 불을 끄고 물을 마시는 닭 다리를 지켜보았다.

나한테 물어? 아내가 되물었다.

어디든 보내야 하나….

닭 다리가 날개를 뻗어 올리며 크게 울었다.

뭘 잘했다고. 아내가 거위에게 윽박질렀다. 어쩔 거야? 그녀가 내게 따져 물었다.

대답을 망설이는데 마침 가게로 전화가 왔다. 카운터로 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영업이 끝났다는 말에 상대가 내 이름을 댔다.

본인인데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물었다.

이현우 상병 관련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누구요? 고개를 낮추고 그의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떨렸다.

아내가 카운터로 다가와 눈썹을 내려트렸다. 누구야? 뭐래? 그녀가 소곤댔다.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고개를 저었다. 아내가 머리를 들이밀더니 내 관자놀이와 수화기 사이로 귀를 갖다 댔다.

지난 십일 월 십구 일 열두 시 사 분 본 사단에 배달 오셨죠? 남자가 말했다.

아, 글쎄요. 확인을 좀 해봐야….

있지도 않은 종이를 뒤적거렸다. 그가 와사비에게 치킨을 배달한 앞뒤 상황을 물었다. 나는 이현우 상병이 치킨 세 마리를 시켜서 배달했다고 대답했다.

아내가 입을 벙긋거렸다.

허락받았다고 해서 배달한 건데 문제가 됩니까? 아내의 말을 따라 했다.

거위를 보셨습니까? 그가 낮은 목소리로 엄숙하게 말했다.

거위요? 웬… 무슨….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정말 못 보셨습니까? 그가 물었다.

거위는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대답했다.

두 마리 보셨죠? 그가 다시 물었다.

두 마리나 있대요? 뉴스엔 한 마리로 나오던데.

협조 부탁드립니다. 보신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가 말했다.

아내가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저기요, 치킨집에 거위가 말이 돼요? 그녀가 언성을 높이고 화를 냈다. 장난도 정도가 있지.

남자는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진짜 어쩌지? 내가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아내가 주방으로 가서 기름을 데웠다. 그녀가 닭에 반죽을 묻혔다.

거위가 상자 밖으로 엉덩이를 내밀고 똥을 쌌다. 나는 눈을 감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혹시 몰라서 닭 다리 하나 따로 챙겼어. 아내가 주방에서 나와 거위에게 치킨을 줬다. 그녀의 손에 비닐봉지에 담긴 닭 다리 조각이 들려 있었다.

강청호에 풀어주자.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자연에서 사는 게 얘한테도 좋을 거야.

거위의 부리에 튀김옷과 기름이 엉겨 붙었다.

괜히 나쁜 짓 하는 것 같네. 내가 웅얼거렸다.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거위를 데려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카운터로 가서 손수건과 종이쪽지를 꺼냈다. 거위가 치킨에 정신을 파는 틈을 타 손수건을 목에 둘러주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창밖에서는 첫눈이 내렸다. 아내와 나는 거위를 태우고 강청호로 향했다. 마지막 달의 첫날, 가로등 빛을 받으며 내려오는 눈만 공연히 낭만적이었다. 자잘하게 내리던 눈은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강청호에 다다를 때쯤 비가 되어 쏟아졌다.

호수를 따라 세운 가로등은 모두 꺼졌지만, 도로의 가로등에서 나오는 빛이 강청호 둔치를 어슴푸레하게 비췄다. 벤치와 운동기구가 있는 작은 공원에 우산을 쓴 연인이 보였다. 산책로 끄트머리에 차를 세웠다. 흙이 드러난 길 너머로 호수까지 잡초가 무성한 곳이었다.

거위를 차 밖으로 몰아냈다. 그것이 잡초를 등지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기다랗고 두꺼워진 부리는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열매처럼 보였고 창백한 얼굴에 붉어진 눈동자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저 눈 좀 봐. 나는 생각했다. 사람일 리 없었다.

아내가 닭 다리 조각을 힘껏 던졌다. 거위가 몸을 낮추고 잡초 너머로 달려갔다. 산책로 끝에 서서 거위가 물가로 가 닭 다리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악취가 났지만, 호수 건너 불빛이 반짝이는 풍경이 제법 아름다웠다.

이런 데다 풀어도 될까. 아내에게 물었다.

그래도 즐거웠는데.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쏟아지는 비에 호수가 일렁였다. 날이 어두워 쓰레기는 잘 보이지 않았고 물결마다 조금씩 내보이는 빛이 우아할 따름이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아늑했다. 손을 뻗어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아내가 우산을 든 내 손을 잡았다.

그때 거위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잡초 너머로 보이는 눈이 번쩍이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잡초가 난 땅의 반을 가로질렀다. 아내와 나는 서로에게서 떨어져 차로 질주했다. 진흙이 무릎 위까지 튀었다.

차 문을 닫았을 때 거위의 부리가 창문을 스쳤다. 사람만 한 그림자가 차에 드리웠다.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당겼다. 거위가 창을 쪼았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엑셀을 밟았다. 바퀴가 헛돌 뿐 차가 앞으로 가지 않았다. 빨리! 아내가 소리쳤다. 문밖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거위가 목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 뻗으며 힘껏 울었다. 차가 움직였다. 백미러로 멀어지는 거위를 바라보았다.

치킨을 한 조각 더 남겨둘 걸 그랬어. 아내가 숨을 몰아쉬었다.

아내를 따라 오전 열 시에 집을 나섰다. 주문이 몰리기 전 절단육을 다듬어야 했다. 강청교를 지나는데 아내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왜? 내가 물었다.

호수 주변에 사람이 모여 있어. 아내가 대답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더는 말이 없었다.

손수건을 발견한 걸지도 모르지. 주차장에 차를 멈추고서야 그 말이 튀어나왔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출은 기대 이상이었다. 더는 거위와 같은 걱정거리도 없었다. 다음 주도 오늘과 같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세 시가 되어서야 숨 돌릴 틈이 났다. 아르바이트생을 쉬게 하고 홀을 맡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이 세 팀, 받아서 먹고 있는 손님이 네 팀이었다.

정수기 옆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불렀다.

이거 보셨어요? 그가 내민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큰일 날 뻔했네요.

SNS에 뜬 거위의 사진이었다. 강청호 공원을 배경으로 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거위가 보였다. 수풀 아래에 떨어진 얼룩무늬 손수건도 눈에 들어왔다. 손수건은 매어 준 사람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흙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티브이 채널을 돌려 뉴스를 확인했다. 강청호나 거위에 관한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누군가가 와사비 간장 치킨과 고구마튀김을 주문했다.

또 뭐 시킬까? 수화기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얘는 맥주 먹고 싶겠지. 여러 명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야, 웃지 마. 내가 그 거위 때문에 몇 번을…. 와사비의 목소리였다. 이제 다 끝났잖아. 누군가 말했다.

습관적으로 주문을 입력하고 홀을 확인했다. 아직도 세 팀이 치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샌가 카운터로 다가온 아르바이트생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산책하던 사람을 깔고 눈을 쪼았다나 봐요. 그가 말했다. 계속 날뛰는 바람에 실탄을 열 발이나 쐈대요.

왜 이렇게 안 나와? 손님 한 명이 투덜거렸다. 와사비와 거위를 뒤로하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소리야? 7번 테이블의 손님이 수군댔다. 다른 손님들도 웅성거렸다. 주방으로 다가가는 동안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벽 너머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넓적한 발로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흰색의 무엇인가가 느리게 주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눈이 검고 왜소한 거위였다.

또 뒷문으로 들어왔나 봐요. 아르바이트생이 투덜거렸다. 어제부터 왜 거위가 난리지?

거위를 지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뒷문은 닫혀 있었다. 주방으로 들어온 거위가 부리를 작게 벌리더니 짧은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부리 사이로 가늘고 희미한 음이 새어 나왔다.

진흙이 묻은 손수건을 떠올렸다. 뒷문을 열고 차로 걸어갔다. 손수건을 찾아야 했다. 종이쪽지와 손수건을 가지고 가서 와사비를 만나봐야지. 거위가 왜, 어떻게 나타났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도 찾아봐야지. 나는 생각했다.

뒤를 돌아 주차장에 선 거위를 바라봤다. 거위의 눈이 일렁이며 조금씩 빛을 내보였다.

 

희곡 당선작 ‘이 생을 다시 한 번’ - 차인영 당선자 (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2241012354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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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조은태 남 30대

진고운 여 현대 : 20대 / 전생 : 10대

유 경 남 현대 : 30대 / 전생 : 10대

전생 조은태 남 30-40대

막 오르면

유 경, 포박된 조은태를 무대 앞으로 끌고 나와 내팽개친다.

무대 중앙에 삽질을 하는 유 경, 무덤을 파는 것이다.

조은태, 도망치려다가 유 경에게 번번이 가로막힌다.

유 경 역시, 인생은 갈등이지. 또 보네 반갑게.

조은태 왜 이래요 또! 돈 다 갚았잖아, 보름 전에!

유 경 ... 자식 노릇 하자.

나보다 더 니네 아버지 소식이 늦으면 어떡해.

유 경, 품 안에서 종이 꺼내 조은태 앞에 펼친다.

유 경 그 인간이 자필 서명한 차용증.

조은태, 소처럼 유 경에게 달려들고

유 경, 종이를 가지고 투우사처럼 조은태를 피한다.

투우 같은 몇 번의 몸싸움.

조은태 갚을 능력 안 되는 사람인 거 알면서 돈을 빌려줍니까?

유 경 눈물로 호소하는데 별 수 있나. 일단 빌려주고 너한테 받는 수밖에.

슬프지만 어쩌겠어. 억울하면 나라를 욕해. 대한민국 법이 그런 걸.

가족주의 가족중심 가족책임. 세상에서 가장 큰 족쇄는 뭐다? 가족.

조은태 난 더 못해 그 인간 잡아 족쳐!

유 경 하긴, 너 정도면 나라에서 변제해주는 게 맞긴 하지.

고등학교 졸업도 못 하고 노가다 판에서 굴러,

마이너스의 손인 아버지 빚 갚느라 쎄가 빠져...

근데 결혼? 빚은 어쩌고. 애인은 뭐래?

조은태 (무릎 꿇고 애원하는) 아니... 안 돼요... 걘 몰라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죽으라면 죽고

그 각서대로 할 테니까 제발...

유 경 아이고 세상에나. 아직 말을 못했구나. 그래서 내가

... 모셔왔지.

유 경, 들여보내라고 손짓.

떠밀리듯 입에 재갈 물리고 포박된 진고운이 떠밀려서 무대에 나동그라진다.

유 경, 진고운을 일으켜 세워 조은태와 사이 두고 앉히고 재갈 풀어준다.

자신과 조은태 사이를 보고 발악하며 비명 지르는 진고운.

유 경 겁먹지 마 아가씨. 여기 들어갈지 말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요.

진고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조은태 내 여자한테 손대지 마!

진고운 ... 자기야! 이 사람들 뭐야, 아는 사이야?

유 경 눈물 난다.

죄송해요 아가씨. 나 이런 사람 아닌데 그쪽 예비신랑이 나를 자꾸

비매너로 만드네. 각서 쓴데요. 신체 포기 각서.

진고운 네?

조은태 듣지 마 고운아.

진고운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요. 이거 공갈협박에 살인미수에요!

경찰 불러요!

조은태 안 돼!

소용없어...

진고운 뭐?

유 경 자,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얘가 지금 결혼을 한다네. 지 인생 통째로 담보 잡힌 줄도 모르고.

진고운 네?

유 경 얘네 아부지가 얘 걸고 돈 빌려서 튀었어요.

진고운 자기야... 이게 무슨 소리야...

유 경 이럴 수가. 아무것도 몰랐구나 진짜.

아가씨, 충고할게. 지금이라도 도망쳐.

내 살면서 이 새끼처럼 인생에 마가 낀 인간은 처음 봐.

하는 족족 다 안 돼 모든 게 태클이야.

(사이)

이 생활 10년 찬데 딱 하나 배운 게 뭐냐면요,

이런 우울한 인생은 참 흡입력이 강해. 무지막지한 진공청소기랄까.

마주친 인연 하나도 허투루 안 흘려. 그냥 다 빨아들이지. 그럼 바로 그냥 블랙홀. 오호 통재라, 불행들 사이에 또 다른 불행성의 탄생.

그렇게 살고 싶어요?

진고운 이해가 안 돼, 이게 다 무슨 얘기야...

조은태 미안해.

진고운 ... 미안하면 다야 이 개자식아!

유 경 안 됐다. 그래도 어떡해. 미안하면 죽어야지.

조은태 미안하면, 죽는 거야...

조은태, 그대로 투신.

진고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잠깐만요... 안 돼!

진고운, 조은태를 따라 나간다.

유 경, 삽을 들고 선다.

유 경 살다 살다 얘처럼 인생 안 풀리는 인간 처음 봐요.

희한한 게...

내 친구 중에 미국 저 실로폰벨리 가서 완전 성공한 애 있거든?

걔도 이름이 조은태야.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어떤 앤 하는 족족 다 잘되고

어떤 앤 뭐 시작도 못해보고 다 무너져.

마지막도 이따위로... 참 암담한 인생.

무대 어두워지고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안개.

그 속을 걸어오는 조은태.

그의 앞에 바닥에 앉은 한 노파.

조은태 저기요. 여기가 어딘가요. 저 여자친구한테 가야되는데요,

노파 도와주시오.

조은태 어, 할머니. 종로 피맛골 입구에서 껌 파시는. 저 아시겠어요?

저예요 3만원. 꼭 3만원어치 산다고 저만 보면 3만원 그러셨는데.

노파, 양손을 뻗는다.

조은태, 노파 앞에 가서 등을 내밀어 노파를 업는다.

조은태 파출소로 가요.

노파 참 불쌍타. 아무리 쌓아도 공이 되는 구나 공덕이.

원망스러웠을 게다.

조은태 말해 뭐해요. 네?

노파, 조은태의 앞을 등불로 막는다.

노파 네 이름 아래 주어졌으나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삶.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붙는 저주.

네 삶을 바꿔보지 않으련?

조은태 혹시 악마세요?

(반가운) 왜 이제 왔어요 영혼 걸게요.

아니면 뭐, 내 삶에 5년 드려요? 10년? 언제를 원해요.

노파 지금.

사이.

E 일천구백이십구년 10월 30일. 일본 학생들이 조선의 여학생들을 추 행하는 사건이 발생. 일본은 전격적으로 조선 학생들을 탄압. 일본 학생무리가 조선인 학생을 집단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해 조선 학 생들의 항일운동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11월 11일.

무대에 나무통으로 만든 책상,

오래된 알전구. 가늘고 여리게 불 들어온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조은태.

보자기를 안고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여학생 진고운,

교복에 모자까지 쓴 남학생 유 경이 들어온다. 유 경은 한쪽 다리를 전다.

유 경, 들어오면서 알전구를 다시 한 번 살핀다.

유 경 오늘따라 더 위태위태하네.

진고운 불이 켜지는 게 감지덕지야.

유 경 참 친근하다, 이 알전구. 꼭 우리 같다.

10월 3일 고조선 건국절에도 천황 생일이라고 기미가요나 불러야 하는 신세. 대한 조선 내 나라에서도 조선인이라고 핍박받는 신세.

진고운 아프다.

유 경 약소 민족 해방 만세! 제국주의 타도 만세!

진고운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진고운, 보자기를 풀어 알전구 아래 책상에 놓는다.

보자기를 푸르면 나오는 종이들.

진고운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유 경, 만세를 부르다가 조은태에 걸려 넘어진다.

조은태, 깨어난다.

유 경 (비명) 뭐, 뭐가 있어!

유 경, 다급히 알전구를 돌린다.

조은태 아이고 머리야.

조명, 밝아진다.

진고운 누구야!

유 경 너, 너 이 변절자!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유 경, 조은태를 알아보고 의자를 번쩍 들어 내리치려 한다.

진고운, 빗자루 끝을 잡고 조은태를 위협한다.

유 경 내 다리 하나론 부족했나?

진고운 어떻게 알고 숨어들었나, 경무국의 더러운 쁘락치야!

유 경 (의자를 던지고 조은태 멱살 잡는다) 또, 누구 인생을 조졌나 이 괴 물아!

조은태 잠깐, 잠깐만!

무슨 말입니까? 쁘락치라니! 난 그저 할머니 따라왔을 뿐인데.

할머니 못 봤어요?

유 경 살려는 변명이다. 헛소리 마!

진고운에게서 빗자루 받아든 유 경, 조은태에게 휘두른다.

조은태, 유 경을 피해 뒹군다.

진고운, 서둘러 종이를 모아 보자기로 감싸는데 종이들이 바닥에 흩날린다.

조은태, 엎드린 채 종이를 보는데

진고운, 조은태 앞의 종이를 낚아챈다.

진고운 절대 못 찾을 거야! 당신이 찾는 이름들!

조은태 ... 이게 무슨 글자야 한글이야?

유 경 닥치라고!

진고운, 조은태의 말이 떨어지자 바로 나무통 뚜껑을 열어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조은태를 겨눈다.

조은태 살려줘.

진고운 살고 싶어?

조은태 오해야. 내가 무슨 쁘락치야, 채무자지. 잘못했어. 살려줘.

진고운 우리도 그랬어! 우리도 살고 싶었어,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우리를 버러지로 취급한 게 누구지?

조선인 학생들을 잡아서 심문하고 학대하고...

당신도 조선인이면서! 그런 인생으로도 살고 싶다니 참으로 딱하다.

(사이)

진고운 날 원망하지 마.

원망할 거면 어제의 너를, 그제의 너를, 총독부에 붙은 너를, 노덕술 아니 마쓰우라 히로의 쁘락치인 너를,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고

비정한 충성심을 보이겠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너를 원망해.

조은태 무슨 소리야, 나는 돈 빌린 죄밖에 없잖아! 갚겠다고! 여자친구까지 잡아와놓고 진짜 왜 이래!

이젠 그냥 날 죽이래? 돈 필요 없대? 유 경 불러, 유 경 부르라고!

진고운 너 이 쓰레기한테 돈 빌려줬어?

유 경 내가?

유 경, 진고운의 손에서 총 빼앗아 조은태를 향해 조준한다.

조은태,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든다.

유 경 그랬다면 이 새낀 죽었겠지.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목숨을 받았을 테니까. 그 더러운 입에 내 이름 올리지 말고 그냥 죽어 이 새끼야.

조은태 그래, 죽여. 죽여라. 와. 내가 진짜.

그래 뭐. 내 주제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죽여 그냥. 잘 됐다 더 살고 싶지도 않았어. 맨날 공사판 노가다 뛰고 그래도 아부지 빚 갚 고 나면 겨우 팔천원 손에 쥐고. 골방에 살면서도 공과금 한 번 안 밀린 적이 없고 맨날 월세 못 내서 보증금 다 깎이고 쫓겨나고... 그 래도 어떻게든 사랑해보겠다고, 어쩌다 일당에서 빚 까고 만오천원 만 쥐어도 좋다고 노량진 갔다. 공시생 여친 만나 컵밥이라도 한 끼 먹겠다고. 그렇게 살았다 내가.

제발 부탁이니 죽여줘라 좀!

(사이)

조은태 나 죽이고 고운이 놔 줘라. 걘 아무 잘못 없어. 아무것도 몰라.

나 같은 새끼도 사람이라고... 사랑해준 죄 뿐이다 걔는!

고운아 진고운. 내가 많이 사랑했다. 나 같은 거 잊고, 행복해라!

(사이)

유 경 진고운?

진고운 이봐, 당신 누구야? 누군데 내 이름 알아? 유 동지 이름은 어떻게 알고!

유 경 진동지, 그 놈에게서 떨어져.

진고운 뭔가 이상해. 팔천원... 만오천원... 만오천원이면... 기와집을 사고도 남아. 이봐 당신, 한글이 이상하다 그랬지? 이거 읽을 수 있어?

조은태 죽여 그냥!

(사이)

조은태 한글 맞아? 맞아... 기역 니은 디귿... 뭐라고 쓰여 있는 건데...

잠깐, 1929년... 1929년...?

뭐하는 거야... 이젠 나를 미치게 만들 작정이야?

진고운 ... 당신, 누구야...

유 경 누군지 알아서 뭐 하게. 이 인간을 믿어? 민족을 판 반역자를?

놔주면 안 돼. 처단해야 돼.

다음번엔, 필시 우리를 죽이려 들 거다.

유 경, 매달리는 진고운을 뒤로 하고 조은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그 때, 유리병이 또르르 굴러온다.

조은태 엎드려!

조은태, 진고운과 유 경을 보호하며 포복한다.

유 경 저리 비켜!

진고운 뭐야?

조은태 둘 다 물러 서!

진고운, 유 경, 조은태가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조은태, 조심조심 가서 보면 유리병이다. 집어 드는데

낚아채는 유 경.

조은태 위험하다고!

유 경 밀서다. 장 형이 보낸 거야.

진고운 왜?

유 경 큰일이다.

진고운 (받아서 읽는) ‘화재로 등불하나는 피신. 머물 곳이 없다.’

그럼 유인물은?

유 경 전부 오 형네서 인쇄할 수는 없어.

진고운 가져오자.

유 경 가능해?

진고운 우리끼린 힘들겠지. 하지만.

유 경 안 돼.

진고운 봤잖아, 이 사람은 우릴 구하려고 했어.

유 경 이해가 안 돼. 이봐, 방금 왜 우릴 덮친 거야.

조은태 여기 어디야.

진고운 광주.

조은태 1929년이 맞아?

유 경 그래.

조은태 일제강점기?

진고운 일제강제점령이란 뜻인가?

조은태 민족을 팔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내가 그랬다고?

유 경 그래. 당신은 일본 앞잡이야. 친일파.

조은태 니 다리는 내가 그랬고?

유 경 (끄덕인다)

조은태 ... 이름은?

진고운 조은태.

조은태, 실소한다.

진고운과 유 경, 조은태를 바라보다 서로 시선 교환한다.

조은태 그랬구나... 이제야 내 삶이 왜 그렇게 엿 같았는지 알겠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와... 이건 그냥... 내가 죽어야지. 그렇게 친일 파를 욕했는데 내가 친일파래. 매국노라니...

멀쩡한 사람 인생도 망쳐놓고 내가...

죽어야지 왜 살아. 억울할 것도 없다. 그냥 죽자.

조은태, 총을 든 유 경에게 달려든다.

총을 뺏기지 않으려는 유 경과 투우하듯 몸싸움.

진고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다.

진고운 그만.

조은태 제발 부탁이다. 그냥 죽여. 죽고 싶다 진짜로. 진심이야. 나도 내가 이렇게 삶에 의지가 없는 줄은 몰랐는데, 이 정도면 그냥... 더 살래 도 싫다. 내가 싫어. 그냥 끝낼게. 나를 쏴라. 사람 하나 구해준다 치고 쏴.

진고운 아뇨.

당신은 조은태가 아니야. 이 세상의 조은태가 아니야.

(사이)

조은태 아니, 난 조은태다 개망나니 친일파 매국노 조은태!

진고운 내 말이 맞지?

유 경 믿을 수가 없어...

진고운 친일파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유 경 이 사람은 대체 누구야.

진고운 누군진 중요하지 않아.

어쩌면, 이 사람은 불씨야, 하늘이 내려준.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미래, 독립이란 화약고에 불을 붙여줄 불씨.

유 경 ... 위험한 사람이야.

진고운 이봐요 아저씨.

조은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허망하다.

진고운, 조은태의 옆으로 간다.

진고운 아저씬 쓰레기가 아니에요.

조은태 뭐...?

진고운 꼭 좋은 사람일 필요 있나요. 나쁘지만 않음 되지. 안 나쁜 아무나 면 돼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가 되고 역사가 돼요. 아저씬 그런 사람이에요. 안 나쁜 아무나.

조은태, 무너진다.

진고운, 조은태를 다독인다.

유 경, 숙연해진다.

조은태 뭘 원해.

진고운 당신의 지금이요. 더해주세요. 이 나라를 위해.

사이.

진고운과 유 경, 둘이 보자기로 덮어씌운 상자를 함께 들고 조심조심 걷는다.

앞에 나선 조은태.

조은태 거 좀 쉬엄쉬엄 해. 날세 경무국 조은태.

화재현장에 아무것도 없었다던데? 폭삭 주저앉아서 형체도 없다며?

쌀쌀하니, 흰 국물이 땡기네.

몸 좀 데우는 게 어떻소?

(사이)

조은태 자 한 잔 받으시고. 건배.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하야”

오늘따라 술이 참 독허네.

어린 아해들이 무엇을 알아 그리했겠소.

이런 생각도 한다오.

아해들은 모두가 귀한 것이오. 각기 다른 반짝이는 하나의 세계라 오. 그런 아해들의 눈을 키워주는 것이 어른의 몫 아니겠소. 시월 삼십 일의 일은 참으로 마음이 요상했소. 어찌 내지의 아해들 은 희롱을 즐겨하는가.

(사이)

조은태 아니 그들을 편든다는 것이 아니고.

생각해보시오. 사촌누이를 남정네 여럿이 희롱한다면 그 누가 옳구 나 하고 넘어가겠냐 이 말이오. 뭐, 내지 아해 오십이 조선의 서른 명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도하오... 아니, 너무 극심한 실망에서 나온 단어니 언짢아 마시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리다.

(사이)

조은태 맞소.

(사이)

조은태 (점점 슬퍼진다) 아니외다, 오늘따라 술이 참 다네.

조선이, 어찌, 본토를, 이긴단 말이오.

조선으로선 대일본제국의 은혜를 입어 무척이나, 감사하오.

조은태, 무릎 꿇고 바닥에 이마를 박는다.

조은태 영광이 아니겠소.

조은태, 다시 머리를 박는다. 흐느낀다.

진고운과 유 경, 사라진다.

사이.

알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처음보다 선명하다.

유 경 붕어눈깔. 못났다.

조은태 어른한테 눈깔이 뭐냐.

진고운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유 경 내가 언제.

조은태 잘 봐둬. 알전구는 이렇게 가는 거야.

조은태, 갈아 끼운 알전구를 책상 위에 놓는다.

책상 위에 보자기에 덮인 물건이 놓여있다.

조은태 이거냐?

진고운 네. 우리의 미래를 밝혀줄 등불.

조은태 너무 거창하면 부담스럽다 얘들아.

유 경 우리 동지들의 목숨이오. 충분하죠.

유 경, 보자기를 벗긴다.

등사판이다.

진고운 아저씨. 한 번 밀어 봐요.

조은태 내가?

유 경 야.

진고운 자격 있어.

조은태, 머뭇머뭇 다가가서 밀대 잡고 밀어본다.

유인물이 하나 완성된다.

조은태, 한 장 한 장 잘 민다.

유인물들이 점점 는다.

진고운과 유 경, 시간차를 두고 떠난다.

점차 푸른빛이 돌고 닭 울음소리가 울린다.

진고운과 유 경, 들어온다.

진고운 아저씨 혼자 이걸 다 했어요?

조은태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진고운 이쯤이면 오백 장 훨씬 넘겠는데요?

조은태 어떡할 생각이야?

유 경 11월 12일. 역사는 오늘을 오래오래 기억할 겁니다.

독립을 꿈꿨던 학생들의 정신은 찬란했다고.

진고운 등교합니다, 자연스럽게.

(유인물 뿌리는 시늉) 흩날리는 거죠, 아름답게.

진고운, 보자기에 유인물 나눠 보따리를 두 개로 만들어 하나는 맨다.

진고운 다녀올 거에요.

조은태 몸조심해.

유 경 댁은요.

조은태 글쎄다.

진고운, 주머니에서 주먹밥을 꺼내 내민다.

진고운 새벽에 쌌어요. 배 곪지 말라고.

조은태 해장엔 라면인데.

진고운 네?

조은태 아냐, 고맙다고. 잘 먹을게.

(사이)

조은태 빛이 드네.

유 경 해가 떴으니까.

진고운 이 땅에 드는 빛이에요. 오래 머금을, 빛.

조은태 잘 지내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지 말고.

진고운과 유 경, 나가다가 돌아본다.

유 경,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와 조은태를 끌어안는다.

조은태 잘, 살아라.

유 경 (조은태 등을 툭 친다)

진고운, 조은태와 유 경을 같이 포옹한다.

꼭 끌어안은 세 사람.

사이.

총소리.

조은태, 진고운과 유 경을 뒤로 돌려세우고 자신이 방패가 된다.

알전구가 팟, 꺼진다.

일시적인 암전.

문 열리고 점점 밝아지는 내부.

진고운과 유 경, 구석에 숨어있고

팔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조은태,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본다.

사복 입고 헌팅캡 눌러쓴 사내 조은태가 등지고 서서 총을 들어 이 생의 조은태를 겨눈다.

조은태 너구나.

전생조은태 어디 숨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이 쥐새끼 같은 놈.

내 얼굴을 하고 반역모의를 해?

... 나라도 속겠네.

이야. 대단하구만.

전생조은태, 총구로 조은태의 뺨을 쓸어내린다.

조은태, 전생조은태의 뺨에 손을 댄다.

전생조은태 어디다 손을 대!

전생조은태, 총을 난사하고

조은태, 총 피하며 책상을 들어 막아선다.

전생조은태, 조은태의 뺨을 친다.

전생조은태 기다려. 지금은 네 놈이 아니야. 저 연놈들부터 족친 다음에...

조은태 상상 그 이상. 진짜 역겹다.

전생조은태 죽여주마.

조은태 쏴주라, 소원이다.

내 얼굴로 내 이름으로 ... 더러운 짓 하는 거 못 보겠다.

조은태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전생조은태.

전생조은태 네 놈들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거야.

조은태 내 소개를 안 했지.

이 다음 생에 너는 내가 된다.

(사이)

전생조은태 (발끈하여 총구를 조은태에게 위협적으로 들이민다) 개소리다.

믿을 수 없다. 재수 없게 나랑 닮은 불령선인.

조은태 (다가선다) 눈썹 옆에 흉터. 눈 밑에 점. 목 뒤에 사마귀. 징글맞게 똑같네. 야, 너 잘 서냐?

조은태, 멍한 전생조은태를 급습해 쓰러뜨린다.

진고운과 유 경도 놀라서 마주본다.

조은태, 재빨리 총을 집어 전생조은태를 눕히고 그의 머리에 총구를 댄다.

조은태 인생은 갈등이라더니, 맞네. 지루할 틈이 없다.

전생을 저주하는 이생이라.

전생조은태 나 하나 죽는다고 달라질 세상인가?

그런 통쾌한 역전극은 현실에선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조은태 그 말이 맞아.

그래도 내 인생은 바꿀 수 있겠지. 내 모든 시작은 너니까.

전생조은태 이봐. 진정해. 같이 여기서 나가자.

시궁창 인생, 내가 구해줄게. 집도 주고 땅도 줄게.

나는 경무청 소속 ...

총을 하늘에 대고 쏘는 조은태.

조은태 좀 잘 살지 그랬냐. 내가 너 잡으러 여기까지 와야겠어?

내 인생 고쳐보겠다고?

전생조은태 내가 다 해주마. 어떻게든 살려줄게. 그러니 ...

조은태 미친놈.

나라 잃고 뭐 어떻게 사는데?

아무리 지옥이라도,

내 인생 거지같고 분단돼서 남북으로 갈린 조국에 살아도

나는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내 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나라에 요구할 수 있는

내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전생조은태 살려줘. 나도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어, 나라를 위해...

조은태, 전생조은태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둘의 몸싸움 끝에 전생조은태의 미간에 총구를 대는 조은태.

두 손을 번쩍 든 전생조은태.

조은태 (전생조은태를 거울 보듯이 들여다본다)

보고 있는 게 사람인지 괴물인지

신이 아무리 손을 잘못 놀렸어도 이렇게까지 끔찍할 순 없어.

이것이 정말로 내 전생이라면 이 몸이 사지가 멀쩡한 것에 감사할 정도야...

총을 들어 전생조은태를 겨냥한다.

진고운 (조은태의 팔을 잡는다) 안 돼요!

조은태 저리 가라, 위험해.

진고운 제발 부탁이에요. 아저씬 아니잖아요 아저씬 안 나쁜 아무나잖아요.

내가 알아요.

전생조은태 잘 생각해봐. 여기서 내보내주면 너희 셋은 보호하겠다. 약속해.

유 경, 흥분해 전생조은태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전생조은태, 돌변해 유 경과의 몸싸움을 한다. 유 경을 인질로 잡는다.

조은태 풀어줘.

전생조은태 이 자식 숨통 끊어도 돼?

진고운 유동지!

유 경 오지 마!

총 내려놔요. 우리는 저들과 달라요. 같아선 안 돼요.

전생조은태 존경스런 동지애네.

살리고 싶으면 총 버려. 어서!

네 놈도 이것들이랑 같이 종로에 목이 내걸릴 영광을 주지.

조은태 네 손이 빠를까 내 손가락이 빠를까.

(사이)

전생조은태 시험해볼까. 난 손이 참 빨라.

조은태 ... 애들은 내보내.

유 경 안 돼요.

전생조은태 좋아. 차분히 얘기해보자고. 우리 둘이. (유 경을 툭 민다)

조은태 나가.

진고운 잠깐만... 아저씨... 진짜예요? 남북으로 나뉘는 거? 지옥인 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독립된 조국이 어떻게 그래요.

조은태 나가라고!

유 경 이대로는 못 가요! 들어야겠어요.

조은태 댁들 잘못이 아냐. 여기서 나가 당장!

진고운 아저씨 잘못도 아니에요 아저씨도 잘못 없어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요 제발.

조은태 빨리 가!

진고운 (유 경에 끌려 나가며) 있잖아요...

그러지 마요 아저씨. 죽이지 마요. 죽지도 말고.

사세요. 살아서... 안 나쁜 아무나가 되세요. 역사가 되세요.

전생조은태 (조은태에 달려들며) 밖에 불령선인들 검거해!

서로 총을 가지려 다투는 두 사람.

전생조은태, 총을 손에 넣고 조은태를 향해 조준한다.

전생조은태 제물이 돼주어 고맙소, 가짜 조은태 선생. (총구를 당긴다)

총소리.

총은 조은태가 맞았는데 맞은 부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건 전생조은태.

조은태 그러니까, 진작에 잘 좀 살라니까...

그와 동시에 조은태도 쓰러진다.

긴 사이.

노파, 바닥에 앉아있다.

조은태, 걸어 나와 노파에게 간다.

노파 왔어? 3만원어치 줄까.

조은태 네.

노파 아니야, 만원어치만 사. 애끼며 살어. 오래 살어.

조은태 네... 감사해요.

조은태, 나가고

노파, 정면을 본다.

노파 껌 사. 안 나쁜 아무나들아.

 

<막>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당선작/심사평/소감 확인 : www.hankookilbo.com/Series/S-PLANNING-SP-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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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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