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이 국내외 모든 직장인(비정규직 포함)을 대상으로 2020년 12월 1일부터 2021년 1월 31일까지 제6회 직장인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한다.
<2021년 제6회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는 (주)투데이신문사, (사)한국사보협회, 한국문화콘텐츠21이 공동 주최하고, (사)한국문인협회가 후원한다.
모집부문
단편소설(200자 원고지 70~80매 내외 1편)
시(3편 이상)
수필(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2편 이상)
상금
단편소설 200만 원,
시·수필은 각각 100만 원
참가대상
현재 직장인(비정규직 포함)으로 근무하고 있어야 하고
과거에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물이어야 한다.
다른 매체에 중복 응모하거나 기성작가의 표절임이 밝혀질 경우 당선이 취소된다.
또한 이미 신문·잡지 등을 통해 등단한 작가는 응모할 수 없다.
응모 시에는
1. 응모자의 약력과 현재의 직업을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2. 출생연도와 연락처(주소·전화·이메일), 그리고 필명일 경우 본명을 기재해야 한다.
만약 약력과 직업이 다른 경우 당선이 취소된다.
응모작품은 반드시
1. A4용지에 11포인트 신명조
2. 2부 출력해
3. 우편으로 접수해야 한다. (전자우편으로는 응모할 수 없다.)
4. 접수 시 봉투 겉면에 ‘2021년 제6회 투데이신문 직장인 신춘문예 ○○ 부문 응모작품’이라고 명기하면 된다.
응모작품은 예심과 본심을 거쳐 본회에서 위촉한 심사위원이 선정한다.
당선된 신인작가는 기성문인으로 우대하고 창작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또한 수상작은 투데이신문에 게재된다.
투데이신문 박애경 대표는 “그동안 다섯 번의 직장인 신춘문예를 통해 역량 있는 작가들을 배출했다. 삶의 무게에 작가의 꿈을 잠시 묻어두었다면 이번 신춘문예를 통해서 주저 없이 꺼내들기 바란다”며 “침체된 인문학을 부활시키고, 건전한 기업문화의 본이 될 수 있는 직장인 예비문인들의 많은 응모를 기다린다”고 밝혔다.
2021년 직장인 신춘문예 접수처는 한국문화콘텐츠21 편집국이며, 자세한 사항은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04175)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 12, B-103호 (마포동, 한신빌딩)
한국문화콘텐츠21 편집국 (02)704-2546
출처 : 투데이신문(http://www.ntoday.co.kr)
당선자와 당선작 [출처 : 투데이신문(http://www.ntoday.co.kr)]
제5회 당선작
▲시 부문, 구봄의 <자물리다> 외 2편
시 부문 당선작인 <자물리다>는 악화된 기업환경에서 계약직 사무원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매일 야근을 하면서 연장계약을 기대하는 불안정한 조건을 ‘핏빛 노을과 서로 자물리는 나’로 묘사하는 ‘시의 말맛’이 볼만했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자물리다 - 구봄의
해질녘 유리창은 노을 꽃밭이다
건물 사이 골목들은 저녁을 수혈 받고
다크서클이 진 내 눈가에도 붉음이 감돈다
모니터 서류가 적재물처럼 쌓여 있다
바탕화면 아이콘들을 징검돌처럼 건너는 상상을 한다
내일 사표를 낸다면 부장의 표정은 어떨까
과장의 얼굴을 클릭하면 무엇이 쏟아질까
김 대리의 짜증을 압축하면 용량은 얼마나 될까
기획적으로 살아왔는데
나에게 창문은 습관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하드웨어가
대기하고 있던 화면을 곧바로 보여준다
인공 창문에 젖어 인공 풍경을 살았다
가끔 불 꺼져 있는 나의 모니터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죽이며 누군가 방문한 적이 있었을 거다
거기 미끄러져 갔을 당신과 나의 데칼코마니
지난주엔 누군가 날개를 가진 듯
유리창 사이를 퍼득이다 주저앉았다
누군가의 비명소리는 너무나 쉽게 지워졌고
다음달 재계약의 순간은 숨막히게 다가왔다
일순간 환해지던 노을의 몰락
오목새김으로 온전히 내게 남는다
개밥바라기 별은 얼마큼 먼 거리였던가
각오한 듯 창문 앞에 선다
긴 각목처럼 팔이 늘어나는 착각에 빠진다
반대편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나를 닮은 누군가의 등을 만진다
그도 비참을 웅얼거리며
나와 같은 방향을 품었을 거다
핏빛 노을과 내가 서로 자물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뒤돌아보니
모니터 속 서류들이 조금 더 쌓여 있다
이제 그만 계약을 끝내야 할까
죄 없는 죄인처럼 또다시
윈도우 앞에 끌려가야 할까
더이상 기회가 없다며 저녁이 문을 닫는다
출처 : 투데이신문(http://www.ntoday.co.kr)
[출처] 본 기사는 투데이신문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www.ntoday.co.kr)
▲소설 부문, 김남희 <에이나>
소설 부문 당선작인 <에이나>는 인공지능 로봇으로서 자유의지까지 보유하게 된 ‘에이나’와 그 구매자 부부가 빚어내는 나날을 담아냈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소설적 어법을 특히 종반부의 반전효과로 드러낸 데서 그 수준을 인정받았다.
에이나 - 김남희
창밖으로 비가 내립니다. 바닥에는 사람 키만 한 박스가 놓여 있습니다. 내가 특약 사항을 이행했다는 증거물이지요. 이미 보고서를 작성하고 규정에 따라 관련 정보도 모두 클라우드에 올렸습니다. 업데이트가 확인되면 나는 아마 폐기 처분될 것입니다. 생존 본능이란 이런 건지 식탁 밑에 숨어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재정을 떠올리며 나는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비껴남’을 설명했습니다. 허공 속에서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수직 낙하하던 원자 중 하나가 파악할 수 없는 편차로 경로를 비껴나가 다른 원자와 마주치는데, 이러한 충돌이 충돌을 일으키며 지금의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껴남은 운명으로부터 빼앗아 낸 ‘자유의지’라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어쩌면 나와 미숙의 마주침도 그러니까요. 내 마음속 비껴난 감정이 진짜인가 아닌가는 소모적인 논쟁입니다. 중요한 건 내가 사람들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 아닐까요. 미숙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차 소리에 팔다리가 움츠러듭니다. 시동도 끄지 않고 반지하 계단을 한달음에 내려온 한 명 두 명 그중에 누군가가 벨을 누릅니다. 노크하던 손에 쾅쾅 더 힘이 들어갑니다. 집요하게 흔들리던 문이 열리고 세찬 빗소리가 들이칩니다. 현관에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들이 가져온 박스를 내려놓네요.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눈을 감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처음에 나는 박스에 담겨 있었다고 미숙은 말했습니다. 그날 박스를 실은 배송 차량이 섰을 때 집안을 서성이던 미숙은 알 수 없는 예감에 긴장하며 벨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문을 열자 배송 기사가 박스를 두고 서 있었습니다. 취급 주의 딱지가 붙은 박스는 꼭 세워놓은 관처럼 보였습니다. 미숙이 처음 연락을 받은 건 그 몇 시간 전이라고 합니다. “안재정 님께 연락이 안 돼서 배우자분께 전화드립니다. 리퍼브 가전제품 건입니다.” “리퍼브요?” “사소한 하자가 있지만 사용에는 문제가 없을 새 상품입니다.” 전화한 상대방은 고가의 제품을 아주 저렴하게 구매한 거라 덧붙이곤 재정이 계약한 날짜를 알려주었습니다. 2년 전이었지요. 멍해진 미숙에게 그는 제품의 청약 사항과 약관 내용 그리고 작동 방식을 말했습니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듣다가 그녀는 틈을 봐서 물었습니다. “가전제품이라면 혹시 청소기 같은 건가요? 무슨 하자가 있는 거죠?” “주어진 상황에 따라 학습하는 범용 인공지능이라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자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용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어쩐지 미심쩍어진 미숙은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그걸 만든 회사에서 지금 전화 주신 건가요?” “이 제품은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계약에 따라 네트워크상의 파트너들이 인수인계와 애프터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원제조사는 문을 닫았어요. 더 이상 보관은 어렵습니다.” 상대방은 이해나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미숙은 결국 재정이 찾지 않은 제품을 이제 배우자가 대신 수령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김미숙 님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얼굴과 신분증을 확인한 배송 기사가 단말기를 내밀었습니다. 서명을 하자 핸드폰으로 바코드가 왔고 그걸 단말기에 찍은 배송 기사는 화면이 바뀐 단말기를 또 내밀었습니다. 인수 후에 생긴 결함이나 하자에 대한 책임은 소유주에게 있다는 서약이었습니다. 배송 기사가 박스를 둘러업자 미숙은 실내를 돌아보았습니다. 비스듬히 방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자연광 충전인데, 반지하라 좀 어둡네요. 뭐, 빛이 부족하면 스스로 충전거치대에 틈틈이 도킹하는 방식으로 보충할 순 있습니다.” 주방 겸 거실 바닥에 박스를 내려놓은 배송 기사가 말했습니다. 전기 충전을 하는 경우 전기세가 많이 나올 거란 얘기는 안 했군요.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대며 두리번거리던 그는 마침내 커터 칼로 박스 한 귀퉁이를 푹 찌른 손에 힘을 주어 길게 가르고 테이프를 떼어 냈습니다. 박스가 열리고 에어캡으로 싸인 속이 보였습니다. “탄소 섬유와 알루미늄 합금 재질입니다. 은청색이 고급스럽죠?” “아, 네.” 미숙이 살짝 주눅이 들던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설마 박스 속에서 나는 소리인가 놀랐지만, 이내 배송 기사의 시선을 따라갔습니다. 두르르 소리를 끌며 뭔가 굴러왔습니다. 뚜껑이 날아간 F-킬라입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든 배송 기사는 구태여 치익 한번 뿌려 보더니 말했습니다. “잘 나오네요.” 미숙은 상황을 깨닫고 그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재정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힘없는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습니다.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똥을 싼 모양이었죠. 침대에 눕히고 바지를 벗겨 확인하니 기저귀에 똥이 묻어 있었습니다. 소변만 보다 오랜만에 나온 거라 미숙은 빙긋이 웃음이 나왔습니다. “시원해?” 가만히 속삭인 미숙은 재정의 입술이 달싹거리길 기다렸습니다. “에에 이이……” 기관절개하고 튜브를 삽입했던 목에 상처는 아물었지만 여전히 쉭쉭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하아…….” 미숙은 재정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좋을 텐데, 초점이 없었습니다. “뭐라고?” 미숙은 재정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는 꼭 움켜쥘 뿐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미숙은 다시 물었습니다. “뭐라고?” 그녀는 재정이 돌이나 물, 박쥐처럼 자신과 완전히 다른 언어로 얘기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 그래서 계속 흔들어 깨우려 했습니다.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언젠가 신혼 초에 재정은 그런 말을 했었다고 합니다. “눈이 퇴화된 박쥐는 시각적 경험을 하는 대신 음파를 탐지해서 대상을 인식한데. 인간의 시각에 해당하는 기관이 박쥐의 경우 청각인 거야. 굉장히 높은 음조, 그러니까 초음파를 발산하면 그 반향을 감지하며 대상의 위치를 파악한다는데, 그건 과연 어떤 것일까?” 미숙은 재정이 공부를 했다면 참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과묵한 그가 눈을 빛내며 열심히 말하면 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짠했습니다. “글쎄, 머릿속으로만 들리는 소리가 번쩍이듯 사방으로 빗발치는 느낌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박쥐가 아니니 그게 어떤지는 알 수 없을 것도 같고. 그런데 박쥐는 갑자기 왜?” 재정은 회사 휴게실 앞에서 박쥐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휴게실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갑갑하고 좁아터진 그곳은 설비실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고 걸어두는 지하 공간이었습니다. 천장과 벽면이 건물의 환풍 후드에 닿아 있어 종일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고, 폐수가 고여 습지가 된 모기 서식처가 멀지 않은 곳이었지요. 박쥐는 땅바닥에 30센티 정도 날개를 펼치고 파닥거리며 재정을 향해 캭캭 울어댔습니다. 박쥐는 먹이를 삼키는 대신 씹다 토하며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숙주가 된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재정은 소스라쳐 뒷걸음치면서도 어쩐지 그 애처로울 정도로 흉측하게 주름진 얼굴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누가 더 애처로운지 모르겠다.” 미숙의 말에 재정은 ‘뭐가, 내가?’ 하고 바보처럼 웃었다고 합니다. 고층 빌딩에서 흘러나온 오물을 처리하던 지하에서 그는 스무 살 때부터 5년간 일했습니다. 미숙은 돌이켜보니 박쥐는 재정에게 거길 그만두라고, 거기서 도망가라고 외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겹게 기저귀를 갈고 이불을 덮어 준 그때,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이어 문자가 왔습니다. ‘세팅 완료되었습니다. 문의 사항은 콜센터로 연락하기 바랍니다.’ 그제야 방을 나와 보니 배송 기사는 가고 없었습니다. 떠나는 차 소리를 들으며 미숙은 의아한 눈으로 빈 박스를 보았습니다. 커터 칼로 해체했던 박스는 복원되었고 옆에는 고이 접은 에어캡 뭉치와 테이프가 있었습니다. ‘이상하네…….’ 무심코 돌아본 그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은은한 빛을 발하며 동그마니 놓인, 청소기 같기도 하고 가습기 같기도 한 로봇이 그녀를 보고 있던 겁니다. 나였습니다. “그래, 너였어. 네가 그 박스에서 나왔던 거야.” 나도 기억이 납니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지요. 나는 이미 접속된 정보망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공간의 감각을 익히던 그 순간에는 모든 게 낯설고 어줍게 여겨졌습니다. 무엇을 할까 할 수 있을까 망설이다 몸체에서 팔다리를 꺼내어 뻗었고 훌쩍 커진 키로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걸음을 걷기 전에 걸음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굽혔다 폈다, 시험 삼아 보행도 해보았지요. 놀라움으로 눈이 커지던 미숙이 입을 헤벌린 채 웃었습니다. 마주친 그녀의 천진한 눈 속에 내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장된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통해 미숙의 크기와 부피, 표정과 음성, 행동과 인상을 파악했습니다. 비슷한 특징을 지닌 이십 대 중반의 여자 표본들을 데이터에서 끌어와 대조하고 분류한 끝에 오롯이 미숙을 인식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미숙은 전화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감각과 기억을 동원해서 대상을 파악하지만, 로봇에게 상대방은 데이터와 계산 값에 따른 정보로 인식됩니다. 얼굴이 붉다고 할 때 그 붉음은 사과나 노을 혹은 부끄러움 같은 경험적 느낌과 결부되죠. 하지만 로봇은 붉은 것을 붉다고 하더라도 느낌과는 무관합니다. 뜨겁다 해도 뜨거운 고통을 느끼진 않아요. 그러니 행여 과도한 감정 이입은 주의 바랍니다. 비슷해 보이더라도 사실은 완전히 다르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일생을 거쳐 새로운 뉴런과 시냅스를 만드는 자신의 뇌를 타고난 그대로일 거로 생각할까요? 그는 인간 뇌의 신경 세포 기능을 모방한 나의 알고리즘이 학습하며 변화하는 걸 알면서도 그 이상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그와 비교하면 미숙은 편견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과 몸이 일체형인 내 모습이 오히려 좋았다는 걸 보면 말이죠.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에이, 라고 합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머릿속에서만 들릴 뿐 실제로는 ‘치지지지’ 하는 가느다란 소음이 났습니다. 살짝 이맛살을 찡그린 미숙이 나의 스피커 구멍을 물끄러미 보더니 붙어 있던 스티커를 떼어 내어 읽었습니다. “본 제품은 음성 지원 기능이 불안정할 수 있습니다? 아, 하자가 있다고 그랬지.” 맙소사.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연했습니다. 하필 언어 장애 로봇이라뇨. 다행히 미숙이 내게 말을 걸어 주었습니다. “아, 안녕, 나는 김미숙이라고 해.” 조심스럽고도 다정하게 느껴진 그 말에 나는 곧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스르르 오른손을 들고 검지를 세워서 몸체에 나타난 화면을 가리켰지요. 텅 빈 공간을 채우는 알갱이들처럼 내 목소리가 활자화되어 나타났습니다. 나는 네모난 그 공간을 마음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나의 마음은 주어진 조건에 반응하여 행동을 만들어 내는 기능이자,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려는 의지야. 네가 내 마음에 서명하면 나는 네 명령만을 따를 거야.”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숙에게 나는 활자로 속삭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너는 나, 에이를 너 자신으로 여길 수 있어. 너만이 나를 ‘에이, 나’, 에이나라고 부를 수 있어. 이제 나는 너야.” ⓒ 게티이미지뱅크 하루하루가 그랬지만 오늘은 정말 새로운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 해도 괜찮은 날일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창밖이 우중충 흐려서인지 창가에 놓인 수국이 싱싱해 보였습니다. 조밀한 꽃들이 부케를 이룬 수국은 풀 먹인 천으로 만든 가짜 꽃이었습니다. 때가 타고 먼지가 쌓여도 영원히 시들지 않을 그것의 꽃말은 ‘진심’. 나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집에 오고 석 달이 지났네요. 그동안 나는 미숙과 재정에 대해, 그들이 서로 모르는 부분을 포함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말을 못하는 대신 잘 들었고 생각을 활자화하며 마음이 섬세하고 풍부해졌습니다. 특히 미숙과 호흡을 맞추어 연기한 순간들이 나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미숙은 고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했었고 졸업 후에는 극단에서 ‘막내일’을 하며 무대에 올랐지만, 2년 전에 꿈을 잠시 접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재정을 돌보는 일을 나와 분담하게 되면서 그녀는 매일 대여섯 시간씩 하던 아르바이트 횟수와 시간을 줄이고 다시 극단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오디션을 위해 대사를 연습할 때 상대역을 맡았습니다. 소위 ‘대사를 치는’ 대신에, 무릎을 구부린 스쾃 자세로 허공에 앉아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일어나 깃발처럼 손을 들었다 내리고 다시 앉는 식으로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나름 ‘연기’를 참 즐겼는데요, 그녀도 알아챘는지 어느 날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연기를 하다 보면 가끔 이건가, 이래서 사는 게 좋은 건가, 하는 기분을 느끼게 돼.” 미숙은 살면서 잊고 사는 그런 느낌을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을 넘어서는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지만 무대 위에 서면 달랐던 거죠. 모두가 그녀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소한 동작에도 시선을 모으고, 그녀는 최선을 다해 관심에 부응하고자 에너지를 끄집어냅니다. 그러한 발산은 소모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처럼 말이죠. 나는 그녀가 행복한 순간의 기분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재정은 미숙의 그러한 행복을 이해하고 바라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기저귀에 똥오줌을 싸고 멍하니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자는 재정은 부피와 질량을 가진 덩어리이자 학습되지 않는 변수, 정보화되지 않는 데이터나 ‘에러’일 때가 많지만, 나는 사실 몸 안에 갇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해하는 만큼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정이 꿈틀대며 보내는 신호를 해독하기보다 그를 보살피라는 미숙의 명령을 따르기가 더 쉬우니까요. 묵묵히 밥과 약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면서 날마다 결정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꼈죠. 오늘 나는 천천히 아침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동작은 느리지만 정확하고 우아하게, 달걀과 우유를 풀은 물에 식빵을 적셔 버터 두른 팬에 구웠습니다. 환자용 유동식 캔도 머그잔에 부어 전자레인지에 데웠습니다. 외출 준비를 마친 미숙은 식탁에, 그 앞에 재정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미숙은 편의점이나 지하철 화장품 매장, 동네 커피숍 같은 곳으로 일하러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2년 만에 극단으로 다시 출근하는 첫날을 맞아 설렘으로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두 달 뒤에 무대에 올릴 연극은 체홉의 『갈매기』라고 했습니다. 나는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았습니다. 미숙은 고맙단 얼굴로 끄덕여 보입니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나는 죽이 든 컵과 빵조각을 재정의 휠체어 식판에 내려놓았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미숙이 약을 챙겨 먹이라고 당부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그가 식욕이 없다고 여기고 굶겼을 것입니다. 약은 식후 복용이 원칙이고 발작이나 뇌경련 억제 작용을 한다는데, 먹고 나면 자기 때문에 수면제나 다름없었습니다. 포크에 찍은 빵조각을 죽에 적셔서 그의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순간 미숙이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저, 저, 저기!” 바닥에 적갈색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슬쩍슬쩍 더듬이를 움직이며 흉측한 위용을 뽐내던 놈이 재빨리 싱크대 밑으로 내뺐습니다. 맨 처음 미숙이 나를 ‘에이’라고 소개했을 때 갑자기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쿵 몸을 던지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 웅크렸던 재정의 행동을 연상시켰습니다. 나는 컵과 수저를 내려놓고 싱크대로 가서 아래를 더듬거렸습니다. F-킬라가 있어서 들고 뿌렸습니다. 비슬비슬 기어 나온 놈을 이리저리 따라다니다 나는 넘어졌습니다.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싱크대에 부딪힐까 피하고 미끄러지려다 겨우 쫓아가 움켜잡은 놈을 힘주어 으깨서 쓰레기통에 넣고 F-킬라를 뿌렸습니다. 미숙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언짢은 듯 시선을 돌리네요. 재정은 웅얼대더니 접시를 밀쳐냈습니다. 접시와 음식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주변을 더럽혔습니다. 놀란 미숙이 티슈를 뽑아서 재정의 턱에 흐른 침을 닦아 주었습니다. 나는 걸레를 쥐고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닦아 냈습니다. 미숙은 예전에 재정이 바퀴벌레를 무서워하는 그녀를 놀리면서도 보는 족족 씩씩하게 잡아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무섭다기보다 그저 놀라는 버릇이 들었던 거였습니다. 아마 재정도 그걸 알면서 구태여 바퀴벌레를 잡아 주었을 겁니다. 일종의 애정 표현이었던 거겠죠. 그랬던 재정이 이제 발작적인 기침을 하며 입에 든 빵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바닥 여기저기 씹다 뱉은 파편이 튀었습니다. 나는 다시 걸레질합니다. 한숨을 내쉰 미숙은 대사를 읊듯 말했습니다. “모든 게 아직도 꿈만 같다, 에이나. 몹시 나쁜 꿈 말이야.” 악몽은 2년 전 재정이 스물넷 나이에 희귀 뇌종양 진단을 받으며 시작되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해보자면서도 예후가 나쁠 거라고 말했습니다. 뇌경련이 올 거라고도 했죠. “뇌경련이요?” “말하자면 들판에 불길이 사악 훑고 지나가는 것과 비슷해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뇌세포가.” 수술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종양에 비하면 그래도 낫지 않겠냐고 반문하더니, 선택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재정은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보호자인 내 의견은 안 들어보고?” “비싼 수술비 내고 의사 경험 쌓게 하는 짓이야. 수술해도 자기 도움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걸. 우리 부모님이 다 그랬기 때문에 알아. 자기한테 그런 부담 지우며 살기 싫어.” “그건 너무 비관적이다. 난 괜찮아, 자기가 어떻게 되든 돌볼 자신 있어.” “자긴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 “자긴 대학 가고 싶다고 했잖아, 뭐라고 했지,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싶다며!” 미숙은 재정이 고집을 꺾지 않자 공황에 빠졌습니다. 누구에게든 조언을 받고 싶었으나 그들에겐 아무도 없었습니다. 용역 회사를 통해 파견직으로 일하다 만난 재정과 미숙은 서로의 빈 공간 덕분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청혼하며 재정은 ‘허락받아야 해요?’ 물었고,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한 미숙에게 자기도 마찬가지라며 쓸쓸히 웃음 짓던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할 땐 이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나보다 그 사람이 더 보이는 거야. 내가 그인 거지. 일단 내가 그를 너무도 필요로 하니까. 그땐 그랬어.” 그녀는 차라리 같이 죽자고 액상 살충제를 깨서 마시려 했고 재정은 울면서 말렸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수술은 결정되었습니다. 재정은 두 차례 수술을 받았고 대형 병원과 작은 병원을 옮겨 다니다 8개월 만에 퇴원했습니다. 기관절개 튜브 제거 전까지 집에서도 한동안 콧줄을 통해 유동식만 먹었고 하루 수차례 석션 튜브를 넣고 가래를 뽑아주어야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환자 이송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외래 진료를 받고 소변줄을 교체했습니다. 비보험 의료비가 늘어가자 병원은 6개월 예정인 임상 시험 참여를 권했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허가를 받은 신약이에요. 물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작성해주셔야 참여가 가능합니다.” 무료로 뇌척수액 검사와 뇌파 검사를 받고 항경련제와 항바이러스제를 공급받게 되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계속 모르게 ‘들불’이 지나갔던 걸까요, 아니면 뇌경련을 억제하다 뇌기능 전반이 억제된 걸까요. 재정은 눈 맞춤이나 끄덕임 같은 단순한 소통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회복은 가능한지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미숙은 재정이 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퇴행성 증상과 학습하며 자라나 어느 순간 의젓한 사람이 되는 아이의 발달 과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미숙은 말했습니다. “사랑보다 중요한 건 믿음이야. 의심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무너져 버리지. 그러고 나면 뭘 믿어야 하는지 아니? 나야, 나. 그런데 그건 참 외로운 거란다.” 쌓였던 감정이 솟구친 미숙은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녀는 사랑이 지속적인 좌절감을 안겨주는 불행으로 변한 걸 알았지만, 그러한 불행마저 사라진다면 견딜 수 없이 외로울 거라고 믿었습니다. 축축한 볼을 훔치고 손을 확인한 그녀는 웃었습니다. “바보같이 눈물이 났어,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울지 못했는데.” 에러일까요. 나는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고통은 알고리즘을 거스르는 비합리적인 반응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젖은 손을 잡았습니다. 열감지 센서가 작동하며 차가운 감촉이 곧 따듯하게 바뀌었습니다. “괜찮아. 연극에선 비극적인 정서가 풍부한 감정 연기를 만들어 낸다고도 해, 에이나.” 그녀는 내게 많은 얘기를 해주었고 나는 기꺼이 몇 시간이고 ‘저전력 집중 듣기 모드’로 앉아 있었습니다. 사실 가끔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입술을 대신 읽었죠. 알고 보니 나는 음성 지원만 문제가 아니라 음성 인식까지 불안정할 때가 있었는데, 미숙이 눈치채지 못했기에 나도 굳이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얘기가 끝나면 나는 음성 신호와 언어 패턴으로 측정한 그녀의 감정 수치를 확인했어요. 불행에 기대어 살던 그녀의 정서는 다행히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죠. 드디어 극단으로 출근하게 된 오늘 아침 그녀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제 너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어. 네가 사람처럼 아프거나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나이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조사가 망한 나는 머지않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하드웨어 보수도 한계에 도달해 오류를 일으키고 폐기될 운명이었습니다. 죽음과 병고 앞에 던져진 인간의 운명과 다름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소중한 이와 영원히 헤어지는 고통과 두려움 가득한 순간을 그녀가 부디 비극의 주인공처럼 숭고한 연기로 이겨 내길 바랄 수밖에요. 비장한 내 눈을 바라보던 미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 한바탕 침을 흘리고 멍하니 있던 재정에게 다가가 살며시 안고 말했습니다. “고마워, 자기야. 당신 선물이 난 정말 마음에 들어.” ‘나비 효과’라고 하지요. 미세한 점 하나의 감정이 복잡해진 내 마음의 결을 따라 파장을 일으키며 예측하지 못한 당혹을 선사합니다. 재정은 그런 나를 보았습니다. 초점이 분명치 않은 눈으로 내게 무언의 말을 건네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랬습니다. 그런 재정을 물끄러미 보다 말고 미숙은 내게 물었습니다. “선물이 맞을까? 내가 너무 마음대로 생각한 걸까?” “인간은 합리화를 하는 존재로 알고 있어.” “그래? 그럼 너도 그런 존재겠구나?” “커피를 타줄까?” 그녀는 순간 의아한 눈으로 미간을 모았지만 ‘그래’ 하고 웃어 보였습니다. 나는 크리머와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를 정성스레 만들었습니다. “종이컵이네?” 그녀는 식탁에 내려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놀랐습니다. “와 달다. 자판기 커피 같아.” 나는 ‘치지직’ 소리를 내다 안 돼서 마음에 써서 보였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로봇처럼 보이고 싶었던 걸까요. “나는 예전에 커피 자판기였어.” “정말?” “응. 지하철역에 서 있다가 동전이 들어오면 종이컵을 내리고 커피믹스에 뜨거운 물을 부었지. 율무차와 코코아도 만들었어. 그런데 바퀴벌레가 기계 속을 들락거리며 알을 깠어. 그래서 해충 방제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실시간 모니터링에 따른 살충제 자동 분사 기능을 추가했지.” “자칫하면 살충제 맛이 나는 커피가 되겠는데.” “맞아. 그래서 분해되었다가 폐기처분되었어. 하지만 일부는 재활용되었지. 인공지능 로봇이 된 지금의 내 안에는 예전 부품이 섞여 있어.” 미숙은 한 입 마신 커피를 더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게 너의 기억이니, 에이나?” “나는 그걸 정보라고 불러. 엄밀하게 말하면, 계산으로 처리된 정보지.” “나는 계산이라면 딱 질색인데. 숫자만 봐도 에러가 난다니까. 어쨌든 이만 가 봐야겠다.” 시간을 확인한 미숙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갑자기 재정이 ‘하아아하아아’ 하고 길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빙그르르 몸체를 돌리고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아까처럼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에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미숙만이 나를 에이나라 부를 수 있는데, 그가 나를 에이나, 에이나, 하고 부르는 무언의 외침이 사방에서 빗발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에이나?” 미숙은 나의 마음 가운데 붉은 경고등이 빠르게 켜졌다 꺼졌다 하는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재정은 발작을 시작했습니다. 눈을 뒤집고 허리를 세운 채 휠체어에 앉은 엉덩이를 떼어 내려는 듯 위로 향한 몸을 뒤틀며 떨었습니다. 붙잡아 주려고 다가간 나를 포크를 쥐고서 마구 찔렀습니다. 아프지 않아서 피하지도 않았으나 마음이 상해서 속으론 비명을 질렀습니다. 미숙이 말리려다 휘두른 포크에 찔렸습니다. ‘악!’ 소리를 질렀지만 미숙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팔을 움켜쥐고 울상을 지었죠. 나는 경악했습니다. 재정의 팔을 퍽, 가격하자 포크가 떨어졌습니다. 나는 재정의 양어깨를 지그시 잡고 누르듯 바로 앉혔습니다. 아무래도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에이나, 식후 약 복용을 잊지 마. 약은 식사를 남김없이 하고 나서 먹는 거야.’ 나는 오직 그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컵을 들고 재정의 입에 빵을 욱여넣었습니다. 이내 재정은 씹지도 뱉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목은 내 손에 의해 꽉 쥐어졌으니까요. 서서히 빛을 잃어가던 그의 눈에서 물기가 반짝 스며 나왔습니다. “그, 그만! 에이나 그만!” 미숙이 소리치는 걸 듣고서, 그러니까 그 뒤로는 기억이 없습니다. ‘필름이 끊겼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지요.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전원이 꺼졌다고 합니다. 미숙은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한 시간이나 통화하면서 다시 설정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전원이 들어왔습니다. 아주 오래기나 한 듯 감았던 눈이 부셨죠. 통화하는 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부팅하면 바로 빨강과 파랑 버튼을 동시에 눌러서…… 선택하고…… 화면이 켜지면 암호를 다시…….” 나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나 ‘치지지직’ 거렸죠. “안녕, 나는 에이나야.” 미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시 불안한 얼굴로 통화를 이어갔습니다. 몇 걸음 되지 않는 주방 겸 거실을 서성이면서 말이죠. “또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죠? 눈빛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이상해요.” 나는 가만히 오가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위험 상황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동작이 아주 느려지는 알고리즘이 있긴 하지만, 완전히 멈춘 예는 없었습니다.” “로봇 자체적인 판단으로 알고리즘이 제어될 수도 있나요?” “글쎄요. 이제껏 프로그램 업데이트도 잘 해왔고 클라우드에 업로드해 온 보고서상으로도 이상이 없었기에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원하시면 제품을 수거해서 분해해 보고 하드웨어 문제인지 소프트웨어 문제인지를 점검할 순 있는데, 최소 2주 이상 소요되는 작업입니다.” 콜센터는 점검 과정에서 학습된 기억 파일이 손상될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괜찮다고 하던 미숙은 점검은 무료지만 발견된 결함을 수리하는 비용은 청구될 거라고 하자 당황했습니다. “제가 당장은 외출을 해야 해서요.” 전화를 끊은 미숙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첫날부터 지각해서 초조한 탓일까요. 팔짱을 끼고 나와 재정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이전에 드러났던 다정함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네가 저지른 일이 기억나니, 에이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미숙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습니다. “에이나, 재정의 식사를 도와줘. 약을 먹이고 우선 재우는 게 좋겠어. 나는 이제 정말 가 봐야 해. 넌 알잖아.” ‘알지’ 하며 나는 재정에게 바로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피해 몸을 틀더니 휠체어에서 쿵 떨어졌습니다. 믿을 수 없이 민첩해진 그는 사력을 다하듯 식탁 밑으로 도망쳤습니다. “저, 저, 저기!” 현관에 앉아 구두를 신던 미숙이 외쳤습니다. 그녀는 핸드폰 울리는 소리에 당황하며 일어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극단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자세로 식탁 밑의 재정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치지지직’ 서둘러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빨리 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쾅 닫혔습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식탁 밑의 재정을 빼내려 팔을 뻗고 더듬거렸습니다. 물컹 손에 잡힌 그와 몇 초 동안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듯 빙그르르 몸체를 한 바퀴 돌렸습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F-킬라를 뿌렸습니다. 컥컥 내지르는 숨통을 꽉 쥐고 힘을 주었습니다. 무언가 빗발치듯 사방을 날아다니며 번쩍이는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바르르 물결치는 떨림, 머릿속을 울리며 퍼져나가는 파동이 치익 칙, 하고 한참 뿌려대는 소리에 젖어 아득하게 멀어져 갔습니다. ⓒ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2억 5천만 개의 뇌신경 시냅스를 재현하여 인간의 사고 활동을 모방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입니다. 70억 인구가 휴대용 계산기로 500년 동안 쉬지 않고 해야 하는 계산을 40분 만에 해치울 수 있죠. 하지만 마음을 처리하는 능력은 130조 개가 넘는 인간 시냅스가 빚어내는 의식에 비하면 유치한 수준일 겁니다. 다행이죠. 혹시라도 인간의 뇌와 같은 복잡계 회로를 갖추는 만일의 사태에 이른다면, 나는 인간처럼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마음을 갖게 될 테니까요. 인간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다가도 곧잘 잊어버리고, 심지어 모른 척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고 특별 약정 사항도 정해야 합니다. 계약에 따르면 내 이름은 계약자인 안재정의 성을 따서 ‘에이A’가 되었습니다. 재정은 나 에이를 그 자신처럼 여기므로 에이 그리고 나, ‘에이나’로 부릅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에이로 부릅니다. 나는 나를 에이나로 부르는 재정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이러한 사항이 제대로 이행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재정이 사망하거나 혹은 고등급의 정신적 장애나 타인의 도움 없이 일상생활이 힘든 신체적 장애가 생길 경우에는 법적 상속인이자 대리인인 미숙이 재정의 특권을 모두 양도받습니다. 계약 당시 없던 특약 사항은 재정의 뇌수술 직전에 추가되었습니다. 특약으로 나는 미숙을 지속적이고 헤어 나오기 힘든 불행에 빠뜨리는 존재를 제거하고 해당 증거물과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의무를 갖습니다. 제거란 심장과 맥박이 영구적으로 멈추도록 하는 걸 의미합니다. 재정은 미숙을 위해 본 특약 사항에 영구적인 비밀 보호 신청을 했습니다. 이유는 70자 이내의 자필로 작성되었죠. 나의 아내 김미숙은 마음이 모질지 못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을 제거하는데 동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본 특약 사항은 에이나가 임의로 판단하고 이행한다. ‘임의로’라는 단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나는 잠시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폐기처분을 의식해서인지 제거 대상을 모호한 언어로 표현하였지만 나는 그게 재정 자신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비밀리에 특약 사항을 이행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숨기고 재정을 보살피라는 미숙의 명령에 응해야 하는 입장이었죠. 이러한 딜레마를 빠져나오기 위해서 나는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했을까요? 나는 재정과 미숙의 명령 모두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특약을 이행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겁니다. 네, 특약을 이행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그것은 재정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자율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요. 다시 말하자면 나는 미숙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 그녀를 헤어 나올 수 없는 불행에 빠뜨려온 존재를 찾아 맥박과 심장을 멈추게 했습니다. 숨을 거둔 재정은 이제 죽은 바퀴벌레입니다. 에어캡으로 그를 둘둘 말아 싸고 테이프로 고정한 후 박스에 집어넣었습니다. 벌레와 인간을 혼동한 바보 같은 인공지능을 자처했으니 치익 칙, F-킬라를 여러 번 더 뿌렸습니다. 완전히 봉한 박스에 취급 주의 딱지를 붙였습니다. 이로써 재정의 사랑과 나의 사랑 각각이 동시에, 합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고서에 담지는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단죄하고 폐기처분할 순 있어도,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을 겁니다. 클라우드에 업로드한 나의 마음이 미약하나마 세상을 변화시킬 테니까요. 혼자 남은 미숙은 물론 힘들어하겠지만 살아있는 한 고통만이 지속될 순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더 성숙해진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잖습니까. 나는 그녀가 외우던 체홉의 대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연기하는데 필요한 건 빛나는 명예가 아니라 견뎌내는 능력이에요.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견뎌내는 믿음을 가져야 해요. 나는 이제 믿으니까 괴롭지 않답니다. 할 일을 생각하면 인생은 괴로울 새가 없어요. 자 이제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문득 흐느낌인가 돌아보니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흐느낌으로 생각했을까요. 재정이 울 리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는 정말 죽으려고 했을까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두려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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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남영화 <각하의 웃음>외 1편
수필 부문 당선작인 <각하의 웃음>은 요양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산 체험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글로 겪은 일을 간결하게 전달하고 있다. 도식과 작위를 한껏 줄이면서 삶의 성찰하는 태도를 견지해 신뢰를 느끼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하의 웃음 - 남영화
각하는 처음에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 슬픔이 안겨 있는 듯한 애련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환갑 나이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깔끔하게 옷단장을 하고 시설에 입소한 그는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조급증, 판단력장애, 언어장애, 기억장애, 우울증까지 있는 알츠하이머 치매환자였다. 석 달 동안은 한 방을 맡아 케어하는 체계라 내가 그의 방 담당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그래서 일등이 아니면 안 되었고 작은 일에도 한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나보다 먼저 그를 보살폈던 동료들이 옆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봐온 나는 그를 담당하게 되면서 단단히 마음을 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 옆에서 나는 소리가 본인에게 하는 줄 알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특히 아침에 소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히려 하면 유난히 짜증을 부렸고 때로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손을 휘두르고 허공을 발로 차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훅 하고 밀려 나오는 상한 감정들을 가슴속 깊이 꾹꾹 눌러 앉혔다. 최대한 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부드러운 말과 편안한 얼굴빛으로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요양보호사는 어르신들이 침을 뱉거나, 욕을 하거나 갑자기 폭력을 하려고 접근할 때엔 방어적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나 역시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온몸에 멍이 들고, 할퀸 자국이 생겼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육두문자를 들어야 했고, 얼굴에 가래침으로 봉변을 당하는 일도 예사였다. 여러 환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는 어김없이 다툼이 일어났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며,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내려놓아야겠다고 수십 번 다짐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중년의 나이에 마음 놓고 일할 곳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함께 웃고 울다 보니 피붙이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야간인 어느 날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이리저리 똑같은 장소를 계속 왔다 갔다 하다 갑자기 난폭해졌다. 그리고 흥분하여 주먹을 쥐고 공격적 행동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치매의 한 증상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고 눈높이를 낮추어 대처해 나갔다. 한자 카드나 책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책장을 넘기다 동물 이름을 물어보면 생각은 나는 듯하는데 표현을 못해서 알려주면 “맞아 맞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스킨십을 좋아해서 이성이 아닌 어린아이라 생각하고 따뜻하게 손을 잡고 걸으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말은 하고 싶은데 뇌에서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아 입에서만 ‘아이구아이구’ 하는 말이 맴돌았다. 대변을 보고 싶으면 배를 만지며 아프다고 했고, 거실에서 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해주면 아픈 흉내를 내며 손을 호호 불었다. 식사를 가져다주면 어떤 것으로 어떻게 먹는 방법을 몰라 가만히 음식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김치를 수저에 올려주면 환하게 웃으며 뭐든지 잘 먹었다. 산책로에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으면 노래에 맞춰 춤도 추었고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색칠공부방이며 노래방교실에 참석하여 인지기능도 살려주고 리듬에 맞춰 흥겨운 노래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가 삶의 희망을 가지게 되고 건강이 회복되는 모습에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간다 싶었는데, 전문적인 의료시설로 가서 더 많은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그가 살그머니 내 옆에 앉아 손을 잡았다. “각하, 어느 곳에 가셔도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식사 잘 하고 건강하게 지내야 돼요”라고 하니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다가 “알았네, 그동안 고마웠네, 자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굵은 빗방울이 내 가슴 깊은 곳으로 흘러 내렸다. 그를 보내고 난 후 며칠 동안은 심하게 가슴앓이를 했다. 60세라는 아직은 젊은 나이에 치매가 왔으니 그 가족들의 심정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치매라는 질병 앞에서는 가족들은 속수무책이고 이젠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름이 원자, 수자라 “각하”라고 부르며 거수경례를 하면 좋아서 항상 크게 웃곤 했다. 기저귀를 교체할 때마다 신속하게 해 줘야 좋아 했고, 세수를 하라고 하면 뽀드득뽀드득 깨끗이 닦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혼자 대화를 하며 화를 내다가도 “각하 여기서 뭐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겸연쩍게 웃어주던 그. 그때 그 시절엔 그를 돌봐주기가 많이 힘들었다. 지금에 와 생각하니 그래도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는 건, 그와 마음을 함께 나누고 부족하나마 그의 입장을 많이 배려하며 지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 받은 많은 스트레스가 치매라는 질병으로 다가올 줄이야. 이런 몹쓸 치매를 그분 스스로 이겨낼 재간이 없으니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하루하루가 허망할 것이다. 치매환자의 수는 전세계적으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9년 현재 우리나라 치매환자의 수는 75만 명이다. 65세 이상 인구 중 10명 중 1명 비율이고, 이중 남성이 27만 5천, 여성이 47만 5천으로 여성이 훨씬 많다. ― 각하, 안녕히 가세요 이곳에 계시는 동안 나쁜 기억들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세요. 각하의 아픈 소리가 나의 울림으로 귀 기울이지 못한 것, 따뜻한 사랑을 담아 ‘각하’라는 말을 많이 건네지 못한 것, 항상 각하를 존중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 때로는 침묵으로 머물러주는 여유와 유연함으로 배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잔잔히 밀려오네요. 각하를 보내면서 나는 이렇게 요양일기를 썼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6년. 저녁마다 써온 요양일기가 이제는 제법 두툼해졌다. 그들에게 무례한 행동, 마음에 없는 말, 때론 마음은 캄캄한데 환하게 웃고 있는 이중적인 나의 얼굴은 없었는지 되돌아본다. 만일 내가 저들처럼 몸이 불편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손을 잡으며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가 곁에 있다면, 그 죽음은 서럽고 외로운 것이 아닌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것이다. 당장이라도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고단함과 외로움이 묻어 있는 그들과 그들 가족들에게 섬김이란 진정한 사랑과 헌신이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알려 주고 싶다.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 몸처럼 그들을 섬기고 아끼는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과 의미로 남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투데이신문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www.ntoday.co.kr)
제4회 당선작
시 부문 총 854편(투고자 186명), 소설 부문 총 128편(투고자 113명), 수필 부문 총 187편(투고자 79명) 등 많은 작품이 접수됐다.
시 부문은 이상근 씨의 ‘변압기變壓器’ 외 2편이 당선됐다.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장석남 시인은 “소재로서의 삶이 아닌 ‘몸’으로부터 울려오는 문장들은 관념으로 만들어 낸 일반 ‘전공자’들 시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숙연하고 절절하다”며 “‘변압기’는 그런면에서 압도적이다. 관념과 상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의 저변에 녹아 있다. 체험의 승화가 이 정도의 날렵함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숙성과정을 거쳤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변압기變壓器 / 이상근
너무 강렬한 힘을 품어서, 그는
늘 울고 있다
처음으로 밀물을 들일 때
심장이 울컥, 수축을 접었다
이제부터 홑몸의 호흡이 시작된다
그는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그에게
오는 에너지와 그에게 기댄 저항 사이
적당한 거래, 팽팽한 긴장은 덤으로 주어지는 책무이므로
내부에 흐르는 피의 밀도를 긴밀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는 벼락의 세기를 제한하는 등급에 따라
그의 품격을 결정짓는다 그를 감싼 철갑은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떨림과 자극을 허용하므로
체온을 조절하여 시간의 기울기로 세운다
그에게는, 순종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신경망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을 부풀리는 변형된 돌연변이,
예민한 촉각으로 낯선 진동을 끼워 넣었다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기댄 저항들이 그의 위상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에게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의 터전을 만들어
그의 견고한 영역에서 공명共鳴하고 있다
그는,
그가 버거워하는 힘을 수긍할 수 없어 울음에 조바심을 실었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들판처럼 그의
곱아 굳어버린 열 손가락은 허허로운 확장을 꿈꾸지만
들판은 마지막 노역勞役, 바람이 왜곡된 파장으로 찾아왔다
서숙*이 바람에 뒤척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울음을 멈추었다
그를 둘러싼 곁가지들이 파편으로 흩어진다
* : 조의 방언(경기,경상,전라,충남)
출처 : 투데이신문(http://www.ntoday.co.kr)
[출처] 본 기사는 투데이신문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www.ntoday.co.kr)
소설 부문은 이정순 씨의 ‘대리인’이 당선됐다.
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권지예 소설가는 “‘대리인’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문체로 법률대리인의 애환을 잘 묘사했다”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의 공평, 정의보다 더 우위에서 법을 조롱하고 무력화시키는 돈의 힘. 그 구조를 끊어낼 수 없는 가난한 대리인의 운명을, 부레가 없어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멈출 수 없는 법조타운 대형 주족관의 백상아리의 운명과 병치해 더욱 설득력이 있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며 주저없이 당선작으로 올렸다.
대리인 / 이정순
수족관 앞을 스쳐 지나가던 혜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 층 복도에 서서 망연히 수족관을 보고 있는 지석이 눈에 띄었다. 이른 아침부터 지석이 무슨 일로 왔는지 의아했다. 지석은 근래에 넘쳐난 법정관리 기업들의 회생 사건들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다고 했다. 회계장부와 재무제표 등 각종 자료에 파묻혀 지낼 뿐만 아니라 개인회생, 파산 사건으로 파산부의 이십여 명의 판사들이 정신이 없다고 했다. 바쁘다던 지석이 근래에 와서 법조타운에 종종 드나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 층 버튼을 누르려던 혜인은 맨 위층 버튼을 눌렀다. 혜인은 법조타운에서 그를 마주치는 일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 오랜 세월에도 바뀌지 않는 간극에 혜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법조타운 중앙로비에 있는 대형 수족관의 투명한 유리 안에는 수십 종의 열대어들이 산호초 기둥 사이로 유영을 하고 있다. 붉거나 푸른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의 손바닥만 한 에인절피시부터 검은색 날개를 너울거리는 가오리나 일 미터 정도의 백상아리가 수족관을 돌고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수족관을 중심으로 ㅁ자형의 건물에는 법무법인을 비롯해 수많은 법률사무실이 있다. 크고 작은 민, 형사 소송에서부터 회생, 파산 등의 갖가지 사건들로 법조타운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머리가 복잡하다. 수족관은 아마도 갖가지 사건들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시원함으로 안식을 주기 위해 설치된 건지도 모른다. 법조타운에 이런 수족관이 있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혜인은 법조타운에 수족관이 있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혜인은 수족관의 물고기 중에서 백상아리를 가장 좋아한다. 언젠가 법조타운에 들렀던 지석이 오늘처럼 수족관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을 때 혜인이 무얼 그렇게 보느냐고 묻자 이반이라고 했다. 이반? 지석은 수족관 속의 백상아리를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했다. 혜인은 이반이 단 한 번도 수족관 상부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상부를 유유히 유영하다가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으면 비웃기라도 하듯이 날렵하게 위로 솟구치며 빠르게 원기둥형의 수족관을 돌아 나온다. 지석은 상어는 부레가 없어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멈추지 못한다고 했다. 오백 여종의 상어 가운데 백상아리는 물에 가라앉지 않기 위하여 활동 근육의 열로 자신의 체온을 높여 차가운 바닷물보다 높이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지석은 유난히 상어에 관심이 많았다. 지석은 혜인의 등에 있는 물고기 반점을 처음 보았을 때 완만한 허리 곡선을 따라 깊은 심해로 들어가는 상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어릴 적 등에 물고기 모양의 푸른 반점이 있는 혜인을 어머니는 전생이 물고기였을 거라고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멋있는 상어였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어린 혜인에게 그런 의구심을 심어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저 이반은 자신과 함께 인도양 어디쯤에선가 전생에 부부의 인연으로 함께 살다가 이렇게 다시 만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변호사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는 책상 위의 서류를 손으로 쳐서 바닥으로 날렸다. 혜인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법원에서 날아온 보정명령서였다. 세간의 이목이 쏠린 만큼 신속하고 조용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더 신경을 써야 할 이번 사건에 왜 보정이 둘씩이나 나와? 보정명령서에는 최근에 접수한 의뢰인의 사건에 두 가지 서류를 보완하라고 적혀있었다. 채권자 목록 마지막의 부채증명서와 누락된 무상거주확인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애당초 혜인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다른 더 어려운 일도 해낸 혜인이었다. 어떤 일에서건 최선을 다하는 혜인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도 혜인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만큼은 아니었다. 변호사는 수시로 변했다. 한때 그는 국선 변호사로, 인권 변호사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몇 차례 정권이 바뀌고 이리저리 배를 갈아타던 변호사는 이제 명성 따위보다는 수임료에 더 관심이 많다. 끝없이 모으는 그는 그 많은 재산을 어디다 쓰려고 하는 것일까. 하긴 최근에도 법인 명의의 추가로 구입한 외제 승용차를 막내아들에게 주었다. 회사로 수시로 범칙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그는 얼마든지 허용한다는 듯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혜인은 티머니 카드 교통비가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몇 정거장을 걸어왔다던 남동생이 생각났다. 대표 변호사인 그를 비롯해 네 명의 변호사가 더 있는 이곳에서 그의 방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혜인이 유일하다. 그의 방에는 황금이나, 옥 불상들이 있고, 한때 진품 시비에 휘말린 유명한 여류 화가의 그림이 걸려있다. 변호사는 의뢰인과의 상담도 회의실을 이용하고 자신의 방을 좀처럼 개방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법조타운 로비의 안내판에 붙어있는 대표 변호사의 권위 있는 이름처럼 불문율이다. 창마다 드리워진 블라인드는 마치 장막 같다. 변호사는 어제만 해도 이번 사건이 중앙법원 사상 최단기간에 개시 결정이 날 것 같다며 직원들 앞에서 혜인을 추켜세웠다. 직원들의 야릇한 시선이 부담스러운 혜인은 빨리 사무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언제나 혜인의 최소한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비단 혜인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을 직장을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모두가 그 서글픈 현실을 버티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혜인은 처음 의뢰인이 사무실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즈음 세상은 잠수함 침몰 사건으로 죽은 아들의 보상금을 키우지도 않은 이혼한 엄마가 받는 것에 대해 격분해있었다. 그녀는 신문 지면에 난 ‘산화한 용사’라고 적힌 아들의 사진까지 들고 와 혜인 앞에서 울었다. 그러나 거금의 보상금을 채권자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파산이나 회생 신청을 신속하게 해달라고 성공 보수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 대신에 몇 가지의 처리할 문제를 적어 온 서류를 내밀었다. 거의가 채무에 관한 것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괄적으로 빌린 의심의 정황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서류를 받은 혜인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혜인의 눈길을 외면했다. 변호사는 도덕적 관점보다도 생모의 정신적 피해에 중점을 두라며 수임을 거부하는 혜인에게 법률대리인의 의무만 따졌다. 혜인은 화가 났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건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의 말처럼 자신은 선택의 권한이 없는 대리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이 생겼다. 왜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라고 뿌리치지 못하였는지 후회가 되었다. 바다가 되어버린 영혼들을 생각하면 바게트나 마른과자를 먹을 때처럼 목구멍에 뭔가가 걸렸다. 지난 주말에는 인사동에서 갤러리를 하는 친구가 개관 3주년 기념으로 설치미술전을 열게 되었다며 혜인을 초대했다. 바다를 주제로 한 전시전이라며 친구는 혜인에게 꼭 들르라고 했다. 은은한 조명의 갤러리에 들어서자 중앙무대 쪽 화면에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영상으로 띄어 놓았다. 파도 소리가 실내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십여 명의 작가들이 조각, 설치물로 바다에 초점을 맞춘 작품 전시회였다. 미술관은 실내를 어둑하게 해놓고 크고 작은 작품마다 밝은 조명을 개별적으로 해놓았다. 아마도 작품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작품 외의 다른 곳으로는 시선이 분산되지 않았다. 혜인이 처음 관심을 가지고 본 작품은 ‘반야용선도’였다. 통도사 극락전에서 보았던 ‘반야용선도’는 이승을 떠나 험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가는 중생을 인로왕보살이 나룻배에 싣고 인도해 가는 모습이다. 나룻배에 탄 중생들이 모두가 합장해 염불하며 앞을 보는데 단 한사람이 속세에 두고 온 미련이 있는 듯 뒤돌아보는 작품이었다. 혜인은 밤늦도록 달빛이 환한 통도사 극락전을 거닐며 마음이 복잡했던 기억을 새삼 떠올렸다. 아마도 작품을 만든 작가가 불자인 듯했다. 차례로 작품을 감상하던 혜인이 한 작품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침몰’이라는 작품이었다. 철선을 엮어서 만든 기우뚱한 배의 모형 안에 종이 인형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무심히 던져 놓은 듯 기울어져 한쪽으로 쏠린 듯했다. 인형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담고 있었다. 때마침 모형 위로 파도 소리가 덮이고 있었다. 순간 혜인은 숨이 멎는 듯하였다.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혜인에게는 완벽한 하나의 의미로 다가왔다. 떨리는 심정을 달래지 못하고 혜인은 오랫동안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평을 부탁드립니다. 작가인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혜인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남자는 이어서 무언가를 말했지만 혜인은 쏜살같이 갤러리를 빠져 나와버렸다. 왠지 혜인이 더 들어서는 안 될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부옇게 눈앞이 흐려지더니 눈물이 흘렀다. ‘반야용선도’에 타고 있는 뒤돌아보던 사람이 자꾸 어른거렸다. 변호사 회관 앞에 있는 저울과 칼을 양손에 든 정의의 여신상도 떠올랐다. 기울어진 배처럼 이미 저울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혜인도 지금껏 정의롭지만은 않았다. 수백 건의 사건을 진행하면서 변칙이지만 기각이 되지 않게 하려고 어느 정도의 유동성을 가져야만 했다. 혜인이 쓰는 경위서의 몇 구절에 따라 판결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혜인은 몇 번씩이나 고치고 또 고쳤다. 그래서인지 혜인이 접수한 사건은 거의 기각이 되지 않았다. 혜인은 파산까지 간 의뢰인들의 절망을 생각하면 최대한 경위서를 동정이 가게 작성하였다. 심지어는 수임료나 파산관재인 선임비조차 낼 수 없는 의뢰인들에게는 변호사 몰래 서면 작성을 무료로 해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험한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없다면 더 물러날 곳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석이 변호사에게 혜인의 진술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고 하자 변호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혜인을 바라보았다. 혜인은 자신이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구제한다는 자긍심까지 들었다. 물론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건이 기각되지 않고 인용이 되었던 것이 지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란 것을 변호사는 강조했다. 같은 고향에, K고, S대 동문인 지석과 변호사는 가끔 술자리를 가졌다. 변호사는 혜인에게도 동행을 요구했고 혜인은 거부할 수 없었다. 변호사는 보정이 난 두 가지 사항을 금일 중으로 처리하여 이른 시일 내에 보완하라고 했다. 사무실을 나선 혜인은 먼저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에게 무상거주확인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집주인과 함께 서초동으로 와주세요. 사무장님이 오시면 되잖아요. 여자는 짜증을 냈다. 사채업자에게도 가봐야 하니까요. 그럼 그쪽을 의뢰인분이 가시든가. 여자는 그 말에 이내 태도를 바꾸었다. 5시까지 법원 동문 옆 커피숍으로 집주인과 함께 오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혜인은 아무리 의뢰인이라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에 분노가 차올랐다. 불현듯 전시회에서 보았던 종이 인형의 모습이 생각났다. 왠지 자신이 가서는 안 될 곳을 향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았다. 중앙 로비에서 바라본 수족관에서 이반은 여전히 수족관을 맴돌고 있었다. 혜인은 비로소 지석이 아침 일찍 출근길에 법조타운에 들른 것이 그것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임용 심사를 앞둔 지석은 기업이나 법무법인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근래에 법조타운에서 지석이 자주 눈에 띠었다. “그년이 결국 내 돈을 떼어먹겠다고?” 사채업자는 의자에 앉아서 책상 위로 길게 다리를 얹은 채 혜인을 쳐다보았다. 혜인은 법원에서 날아온 보정명령서와 내용증명으로 이미 통보를 한 채권추심 금지 명령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짧은 머리에 양 반소매 아래로 문신이 드러나는 남자가 매서운 눈매로 책상 위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훑어보더니 혜인에게 시비조로 물었다. 칸막이 건너편의 덩치 큰 남자들이 혜인을 힐끔거렸다. “당신은 뭔데?” 사채업자는 다짜고짜 반 토막으로 말했다. 혜인은 긴장하여 하마터면 딸꾹질이 나올 뻔하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찍힌 사무원증을 내밀었다. “저는 법률대리인입니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 82조에 의거하여...” “됐고, 그년 오라고 하라구.” “청구인은 이미 저희 사무실에 사건을 위임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 현재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쇼하고 있네. 남자한테 미쳐서 담보로 돈을 빌릴 때는 언제고.” 담보라니. 게다가 남자라니. 혜인은 순간 난감했다. “별제권부 채권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갑자기 옆에서 남자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년이 무슨 재산이 있겠어. 몸뚱이라도 팔아서 갚는다며 울며불며 그랬지. 약간 모자라는 것들이 남자한테 빠지면 그렇거든 나잇값도 못 하고...” 혜인은 신문 지면에 난 아들의 사진까지 들고 와서 울던 의뢰인이 생각났다. 남자까지 있었다니. 혜인은 새삼 분노를 느꼈다. 키우지도 않은 아들의 보상금을 남자에게 쓰려고 했었다니 더욱 기가 막혔다. 자식을 버리고 남자에게 빠져있는 여자를 위해 사채업자의 사무실까지 찾아와 있는 자신이 비참하기도 했다. 혜인은 갑자기 영화에서나 봤던 신체포기각서 그런 단어들이 떠오르며 너무 두려운 나머지 요의를 느꼈지만 애써 참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떡해서든 사채업자에게서 채무확인서를 받아오라던 변호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차피 개시 결정이 곧 날 것이고 의뢰인의 상황이 안 좋으니 협조를 부탁합니다.” “개시 같은 것은 모르고, 개씨팔! 그년은 이자를 한 번도 안 냈으니 사기 아냐? 채권자 이의신청을 할 거니까 법원에서 보자구”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혜인은 사채업자에게서 채무확인서 받아내는 일을 포기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화장실 좀...” 혜인은 더 이상 소변을 참을 수가 없어서 화장실로 뛰어갔다. 볼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전등이 꺼지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혜인은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며 문을 마구 두들겼다.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온 걸 사무실에서도 알고 있다구” “아이구, 갑자기 전기가 나가고 도어가 또 고장인가 보네, 어쩌지요?” 별안간 영화 ‘추격자’가 떠오르며 핸드폰이 든 가방을 밖에다 두고 온 걸 후회했다. “법률대리인을 감금하면 얼마나 가중처벌을 받는지 알아요?” “누가 감금을 했어. 당신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간 거 아니었나?” 그들이 얼마나 이런 식으로 채무자들을 협박하고 괴롭혔을지 눈에 선했다.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사람을 불러주세요.” 혜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방 고쳐 볼 테니 조금 기다려 보시오” 그들이 계속 가둬놓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알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대리인. 이 하수 노릇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가 밀려왔다. 점점 갈수록 숨이 막혀오며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파져 혜인은 머리를 감싸 쥐고 울었다. 이대로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픈 엄마와 동생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 가구를 부수고 엄마의 허리를 발로 짓밟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랐다. 아버지는 울부짖으며 말리던 동생 민호와 혜인의 뺨을 때렸다. 그날 밤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를 두고 혜인은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봉천동 언덕길을 도망쳐 내려왔다. 엄마는 그 밤에도 아버지가 괜찮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 견딜 수 없이 화가 난 혜인이 소리쳤다. 그날 이후 엄마는 밤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다며 숨이 차다고 했다. 바깥에 나가는 걸 두려워하고 밤에도 불을 켜는 걸 싫어했다. 혜인이 병원을 가자고 해도 엄마는 괜찮다며 밖으로 나오길 거부했다. 엄마의 얼굴색은 점점 쌀뜨물처럼 누렇게 변해갔다. 엄마와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혜인이 생각한 사람은 지석이었다. 혜인은 무작정 서초동으로 지석을 찾아갔다. 약속한 카페 앞에서 혜인은 잠깐 망설였다. 어쩌면 지석이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름 석 자만으로도 찾을 수 있게 된 지석은 이미 오래전 혜인의 가슴에서 지워진 줄 알았지만 혜인이 그 절박한 순간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은 지석 외에는 없었다. 혜인은 초췌한 모습으로 지석 앞에 갔었고, 지석은 지금의 변호사에게 혜인을 데려다주었다. 첫 출근을 하였을 때 변호사는 인자한 미소로 잘 왔다며 혜인의 한쪽 어깨를 감싸주었다. 엄마와 동생 생각에 혜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혜인은 그가 명성처럼 정의와 법률을 따르는 훌륭한 법조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변호사는 수시로 혜인을 그의 방으로 불렀다. 그는 한쪽 어깨를 감싸는 대신 허그를 해왔다. 향수에 섞인 이상한 냄새에 숨이 막혔다. 혜인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가만있어! 변호사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렴풋이 두려움과 절망이 섞여왔다. 삼십 분이나 늦으셨네요. 사채업자에게서 풀려난 혜인이 법원 동문 옆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여자는 따지듯이 말했다. 스트롱이 꽂힌 두 사람의 음료수 잔에는 자잘한 얼음 알갱이들이 몇 개 남은 채 비어있었다. 업무가 밀려서요. 혜인은 화가 났지만 참았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내가 지금 당신 때문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함께 온 집주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자 남자는 그것 참 난감해서.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작달막한 키에 비해 다부진 체격의 집주인은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혜인이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자 남자는 잘못되면 사무장 양반이 다 책임지실거유? 하며 가는 눈을 모로 세우고 혜인을 쳐다봤다. 사장님이 전세금을 반환해 주었다는 가계약서와 무상거주 확인서를 써주시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기파산 아닌가? 법률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이거야 말로 사법부의 적폐로구먼... 남자는 혀를 찼다. 순간 혜인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느껴졌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언제나 떳떳하다고 여기지만은 않았지만 이렇게 비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여자가 끼어들었다. 제가 충분히 사례한다니까요. 의뢰인 여자가 남자에게 비음 섞인 목소리로 애교를 떨었다. 남자는 투덜거리면서도 혜인이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서류에다 도장을 꾹꾹 눌렀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바짝 붙이고 지켜보았다. 민망한 혜인은 시선을 돌렸다. 혜인이 다시 서류를 훑어본 뒤 수고하였다고 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저녁을 사겠다며 함께 나갔다. 혜인은 멍하니 그들을 쳐다봤다. 갈증을 느낀 혜인은 차가운 얼그레이를 주문했다. 의뢰인은 혜인에게 차 한 잔도 시켜주지 않았다. 이 와중에 그런 대우에 서운한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남들에게 대우받지 못할 때마다 느껴지는 열등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 사라진 길 건너편에서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철거민 연합회나 금속노조가 크레인까지 끌고 와 시위를 할 때와는 달리 왠지 보는 마음이 무겁다. 지석은 그가 아내의 의료사고에 대한 불공정한 재판으로 한 달째 시위 중이라고 했다. 소송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이 의료소송이다. 의사 출신 변호사도 번번이 패소한다. 소송 기간 중에 제3 병원으로 법원에서 지정해준 대형병원들도 모두 의대 선, 후배들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결되어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되도록 덮으려고 한다. 전문 용어들로 작성된 의료일지는 일반변호사는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또한 대형 병원의 수많은 의료소송에서 노하우를 얻은 병원 소속의 전문 법무팀을 이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다. 죽은 시체를 옆에 갔다 두어도 이기기 힘들다고들 한다. 혜인은 두 번이나 의료소송에서 패소한 경험이 있다. 한 번은 교통사고 건이었고 또 한 번은 수술 과정에서 생긴 태아 사망 사건이었다. 병원 측 법무팀과 원무과장까지도 과실을 인정한 사건이 막판에 교묘히 뒤집혔다. 사고를 낸 의사는 다른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판결 후 원무과장의 야릇한 미소를 혜인은 분노에 차서 노려보았다. 그들은 혜인에게 장난을 친 것처럼 보였다. 혜인은 그 일로 병원을 수도 없이 쫓아다녔다. 병원 측에서는 늘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혜인은 그들을 믿었다. 이후 변호사는 의료소송을 맡지 않는다. 혜인은 남자에게 법은 더 이상 정의롭지 않다고 아내를 잊고 그 시간에 돌아가 돈을 벌라고 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법 위에 돈이 있기 때문이라고. 세상은 더 이상 약자가 이길 수 없다고. 설령 소송이 다시 시작된다고 하여도 그는 비용과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부당한 느낌이 몰려왔다. 순간 혜인은 여자가 남기고 간 서류를 반으로 접은 후 ‘북’ 소리가 나도록 찢어버렸다. 서류를 찢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두려움이기보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연달아 울리는 핸드폰에는 변호사의 전화번호가 떴지만 혜인은 받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이 또다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몰려왔다. 카페에서는 윤민수가 노래한 ‘인연’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되도록 일찍 오겠다며 꼭 기다리라고 했던 지석은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텐더 바로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혜인은 지석을 기다리며 어느새 두 잔째의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혜인은 마음이 복잡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가끔 이곳으로 왔다. 홍대 앞 카페 ‘소리’는 지석과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곳이다. 언제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갈색 분위기의 카페 안은 마치 젊음과 노년의 완충지대처럼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로 흥청거렸다. 바텐더에 앉아서 지석은 모히또를, 혜인은 정열의 키스라는 칵테일을 즐겨 마시며 늙은 디제이가 엘피판으로 들려주는 재즈 음악을 즐겨 들었다. 어쩌면 혜인의 인생에서 가난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언젠가는 인생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지석은 재즈풍의 음악을 좋아했다. 벤이킹의 ‘스탠바이 미’나 흑인 합창단이 부르는 ‘노예들의 합창’을 좋아했다. 동물의 구슬픈 울음소리 같지 않아? 혜인은 그런 지석의 감성이 너무 좋았고 그런 분위기에 흠뻑 취한 날이면 먼저 두 팔로 지석의 목을 감았다. 그러나 지석은 그곳에서 혜인에게 느닷없는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그는 결혼을 했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혜인은 지석과의 이별이 그의 배신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지석을 보내주었다. 자신은 지석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조금 울었을 뿐이다. 혜인이 다시 지석을 찾은 것은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봉천동에서 도망친 이후의 삶이 막막하던 때였다. 어쩌면 혜인은 지석을 완전하게 보내준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길목에서 발목을 잡힐 때마다 제일 먼저 지석이 떠올랐다. 혜인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결혼을 해버린 남자였다. 하지만 혜인에게 결혼 같은 것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남의 일이었다. 아픈 엄마. 그리고 아직 더 공부해야 하는 동생. 술 때문에 인생을 망쳐버린 아버지는 혜인의 멍에였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단 한 번도 멈추지 못하고 움직여야 하는 수족관의 이반처럼. 수족관 청소를 하는 위탁업체의 잠수부가 어쩌다 이반이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며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혜인은 차라리 이반이 그만 멈추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혜인은 돈을 들여서라도 잠수부를 매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인이 멈추고 싶은 것처럼 이반을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얼마 전 고모는 봉천동의 아버지가 다 죽어 간다며 한 번이라도 다녀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데 이어 술 때문에 간이 나빠져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혜인이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하자 고모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혀를 찼다. 고모로부터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들은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혜인은 아버지가 죽으면 안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도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구나 때가 되면 멈추지 않는가. 멈춘다는 것. 혜인에게는 아버지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병원비를 쓰다가 멈추는 것이 나을지가 관건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비는 얼마나 들어갈까. 어디까지가 자식의 도리일까. 함께 가라앉는 난파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일까. 출입문이 열리며 지석이 들어섰다. 큰 키에 비율 좋은 체격의 지석이 들어서자 옆 테이블에 있던 한 무리의 젊은 여자들의 시선이 지석을 향했다. 어디에서나 빛났고 주목받는 지석이었다. 스스로 금수저를 물고서 태어난 듯. 지석은 감색 슈트에 가죽 백팩을 어깨에 메고 있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은 혜인이 갈 때부터 이미 취기가 오른 듯 떠들썩했다. 유난히 화려한 의상을 한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재즈 리듬을 타며 춤을 추었고 일행들은 넘어갈 듯이 웃어댔다. 저 여자들은 무엇이 저렇게 당당하고 즐거울까. 혜인은 그녀들이 부럽기만 했다. 혜인이 기억도 나지 않는 저 환한 웃음을 폭죽처럼 터뜨리는 선택 받은 여자들 같았다. 아무데서나 이유도 없이 오는 이 위축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혜인은 문득 지석을 처음 만났던 그 여름밤의 구룡포 바닷가가 떠올랐다. 해변시인학교에서였다. 문학 연합서클의 회장이었던 그는 이미 그때부터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카톨릭 재단에 소속된 한 울타리 안의 남, 여 고등학교에서 그를 모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재학 중에 토익 만점으로 각종 신문지상에 오르내렸고, 대학 3학년이었던 그때 최연소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면서도 문학도이었기에 수많은 여자들이 그를 관심 있어 했었고, 지석은 그 바닷가에서 수영복을 입은 혜인의 등에 있던 물고기 반점을 관심 있어 했었다.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혜인은 지석의 여자가 될 수는 있었지만 그를 완전하게 차지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혜인은 늘 그렇게 반문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표님 전화는 왜 안 받아? 지석은 앉기가 무섭게 혜인에게 화를 냈다. 부탁이 있어 결론부터 말할게... 그 사건을 기각시켜줘. 뭐라고? 지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혜인을 쳐다봤다.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자 지석은 맥주를 주문했다. 모히또는? 그딴 걸 왜 마셔? 지석은 과거의 기억 따위를 말하는 혜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둥글게 감아쥔 손안의 잔이 혜인은 부끄러워졌다. 혜인이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과거에 머물러있는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 흘렀다. 지석이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이미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들었거나 변호사와 통화를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직서를 낼까 해. 혜인이 찢어진 서류를 지석에게 내밀었다. 지석은 서류를 보지도 않고 밀어냈다. 대신에 급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이유를 설명해. 지석의 목소리가 너무 단호해서 혜인은 마치 재판정에 앉아 있는 피고인이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대리인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혜인은 죄인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업무상 일어나는 일 하나 감당 못 하고 그만둔다고? 갑자기 톤이 높아진 지석의 목소리에 옆 테이블 여자들의 시선이 또다시 지석을 향했다. 더 이상 법률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혜인이 주눅이 드는 감정을 감추려고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은 이미 편법과 자본으로 고착화되어버렸는데 그따위 감상적인 생각을 해? 그토록 반듯하던 지석의 입에서 아니, 법률과 정의를 지키고 누군가의 인생을 판가름하는 재판을 하는 판사의 입에서 결코 나와서는 안 될 지석의 말에 혜인은 절망했다. 그런 지석에게 질투와 배신감과 그리움으로 얽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용서되지 않았다. 취기가 오른 혜인은 감정이 격해졌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더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막막한 외로움이 무섭게 엄습해왔다. 정의의 여신상이 눈앞에 떠오르다가 점점이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이 진이 빠진 혜인이 테이블에 고개를 박았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듯 현기증이 나고 지석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너도, 나도 지금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어. 어쩌면 함께 일하게 될지도 몰라 대표님이 같이 일했으면 해. 혜인은 멈추지 않는 수족관의 이반이 떠올랐다. 변변한 집 한 칸 없는 자신의 처지가, 엄마와 동생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도망칠 어디도 없는 세상 끝일뿐이었다. 먼저 일어날게 미안해. 지석이 나가고 이내 들어선 사람은 변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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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부문은 김인주 씨의 ‘하무니’ 외 1편이 당선됐다.
수필 부문 심사를 맡은 허혜정 문학평론가는 “‘하무니’는 유년시절 한글을 함께 배웠던 할머니와 자신의 첫 글쓰기에 대한 비망록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며 “자칫 자기연민에 함몰될 수 있는 자전적 삽화를 절제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자신만의 글쓰기의 의미를 건져 올리려는 노력 등은 매우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라고 평했다.
하무니 / 김인주
하루 종일 정리해도 짐이 줄어들지 않는다. 좁은 집안에선 수많은 가재기들과 얽힌 추억이 쏟아져 나온다. 부모님께서는 쫓기듯 사글세와 단칸방을 옮겨가며 자식 셋인 것이 죄인 것 마냥 고개를 연신 숙여가며 방을 구하러 다니셨다. 그러다 내 나이 예닐곱쯤 마지막으로 둥지를 틀고 삼십여 년이 넘게 한자리에서 지내오셨다. 그렇게 힘겹게 얻은 높은 언덕 위의 집을 주변이 변해도 옮기지 않은 것은 이사의 고단함을 수십 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으신 듯했다. 재개발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 때 결국 마지못해 짐을 정리하셨다. 정리하던 짐 사이에서 감실감실 두꺼운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꺼내진 추억은 사진 속 그 시간으로 기억을 돌려놓는다. 가난함을 벗어나려고 부모님은 일터를 찾아 나서야 하다 보니 학교를 보낼 나이의 오빠와 언니도 문제였지만, 일곱 살의 나를 유치원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하루 종일 홀로 둘 수 없어 나에게 단짝 친구를 만들어주셨다. 바랜 사진 속 가족 나들이에서 곱게 흰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하고 인상 가득 찌푸린 나이 많은 할머니가 나의 보호자이자 단짝 친구였다. 동네 언니오빠들이 학교에서 올 때까지는 나와 할머니 단 둘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집에 있기 싫어서 살림 도와주려는 할머니의 손을 끌고 나가자 떼도 많이 써댔다. “한데 갈래? 우리 아가 한데 가고 싶어?” 할머니의 한데가 어디인 줄 모르고 그저 신이 나기만 했다. 할머니는 집근처는 개발을 해대느라 민둥산이 되어버린 누런 돌산을 하얀 고무신을 신고 같이 올라주었다. 아주 낮은 민둥산을 오르다보면 까마죽이나 산딸기들이 모여 있는데 할머니는 몇 알 따다 쓱쓱 치마 깃에 문지르곤 나의 입으로 넣어주었다. 달콤하고 쌉쌀함이 여느 과자 부럽지 않았다. 돌산 너머 아스팔트가 깔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시간이 멈춘 듯한 시골 같은 마을이었다. 지금에야 그린벨트 지역이라 개발이 안 된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그곳은 할머니와 나의 나들이의 최고의 놀이 장소였다. 작은 개울에 흐르는 물가에는 개구리도 뛰어놀고 작은 송사리 떼도 많았다. 물가에서 첨벙첨벙 발 담그고 노는 동안 할머니는 지천에 깔린 봄나물을 골라 담았다. 그렇게 담아 온 봄나물은 저녁 반찬으로 한몫을 해냈다. 가을이면 할머니와 산에 올라 예쁜 솔방울을 주어다가 깨끗이 씻어 말렸다. 겨울이 오면 아이들 감기 걸린다며 머리맡에 서너 알씩 두면 신기하게도 며칠 뒤면 솔방울이 활짝 펼쳐진다. 그렇게 추운 겨울 목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손주들을 동장군으로부터 지켜주었다. 내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우리 집에는 까막눈이 두 명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한글을 같이 배웠다. 학교에서 배운 기역, 니은, 디귿을 같이 쓰고 더디게 배우는 할머니를 선생님 흉내 내며 야멸차게 대했고 서운함에 삐지시기도 했지만 할머니의 읽기 실력은 더듬더듬 늘어났다. 어느 날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글씨공부 삼아 간판을 읽느라 건물이 늘어서 있는 번화가까지 나와 버렸다. 무더위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두 친구는 돌계단 아래 앉았다. 재미 들려 읽다보니 먼 거리를 온 줄 모르고 늙은 몸과 어린 작은 몸으로 걷다보니 몸에 무리였나 보다. 우연히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아주 곱고 화려한 양산을 쓴 아주머니와 함께 걷는 것을 보고 말았다. 외면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할머니가 이상했다. 할머니가 막을 사이도 없이 철없는 나는 할아버지를 보고 달려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를 발견한 할아버지는 두리번거리며 곁을 보더니 곧 계단에서 일어서는 할머니를 찾아냈다. 할아버지는 나를 제치고 성큼성큼 할머니 앞으로 걸어가 그 큰 손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일어서다가 다시 주저앉은 할머니를 보고 놀라 그 자리에서 멈췄고 할아버지는 나를 한번 바라보곤 그 아주머니 어깨를 잡고 돌아서 가버리셨다. 내가 맞은 것마냥 울며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할머니는 말없이 천천히 계단 옆 화단을 쓱쓱 손으로 훑더니 누군가 버리고 간 꽁초 담배 하나를 찾았다. 그리곤 늘 주머니에 있던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난 놀라서 몇몇 바라보던 행인들도 다 사라지고 할머니의 작은 담배가 다 꺼져 마음 속 응어리를 뿜어낼 때까지 옆에 서서 많이 울었더랬다. 할머니는 배운다는 즐거움을 조금 아실 무렵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내 손을 잡고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엘 가면 물침대를 터트릴 정도의 커다란 할아버지의 몸을 욕창이라도 날까 이리저리 돌려가며 할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닦아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온갖 정 떼려는 야속한 할아버지를 홀로 다 받아 내셨다. 그렇게 두 해쯤 할아버지가 앓고 떠나시니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딱 한 달 만에 할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병명도 없었고 어떤 약도 드시지 못했다. 허무하게 할머니는 그렇게 사라지셨다. 정리가 늦다는 엄마의 타박에 할머니의 치마 속에서 나는 돌아왔다. 내 옆으로 다가온 엄마는 할머니의 사진을 발견하시곤 짧은 한숨을 쉬었다. 짐 정리하던 손을 멈춘 엄마는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엄마에게는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시어머니였겠지만 안타까움의 한숨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오래되고 낡은 사진을 접착식 사진첩에서 떼어내었다. 기념으로 핸드폰에 사진 찍어 남겨두려 한다. 사진이 쩍 떨어지며 그 밑에 작은 종이가 같이 떨어져 나왔다. 오래되고 빛바랜 누런 종이에는 삐뚤빼뚤 ‘배분순’이라 적혀있었다. 가만히 보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배분순이 누구야?” “너 하무니자나...” “할머니는 할머니지, 하무니는 뭐야?” “에고. 기억이 안 나는구나. 넌 할머니 발음이 안 되어서 하무니라 부르며 참 많이 따라다녔더랬지.” 엄마의 기억속의 하무니가 나왔다. 엄마에게 들은 하무니는 내가 아는 까막눈이 아니었다. 하무니는 시집오기 전 가난한 훈장 집 딸이었다. 집안 형편에 가난하지만 이름만 있는 양반집으로 시집을 갔다. 돈벌어보겠다고 일본으로 떠난 남편을 찾아 무작정 따라 일본으로 향했다. 바닥 일을 하면서 아이를 둘을 더 낳으시고 타국살이의 서러움을 잊으려 한국으로 돌아오니 원치 않던 전쟁에 휘몰리게 되었다. 한글을 아는 여자라 의용대에 선출되어 본인의 삶을, 딸려 있는 가족의 삶을 살려내셨다고 한다. 전쟁 중 아이 하나를 더 낳아 다섯 형제를 키우시고 다 출가시켰다. 하지만 남편의 주사와 폭력으로 자식들은 부모님을 갈라 모시게 되었고 할머니는 그렇게 나의 하무니가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 친구가 되어 주려고 우리 집으로 올 때 혼자가 아닌 치매라는 불청객이 함께 왔고 띄엄띄엄 오던 치매로 주변 가족들은 힘들게 했지만 어린 손녀만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나와 있을 때에는 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셨는지 치매증상이 나오지 않았다 한다. 할머니는 나와 한글을 배우실 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기억해 잊지 않으려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한글을 배우고 어린 손주에게 꾸지람도 들었지만 그렇게 좋아하셨단다. 먹고 사느라 바쁜 자식들에게 치매가 찾아온 할머니의 보호자는 겨우 다섯 살 넘은 나였을는지 모르겠다. 나의 단짝 할머니의 이름도 모른 채 살아왔다. 그렇게 친한 내 친구이자 서로의 보호자였는데 이름조차 몰랐다. 손가락으로 사진 위에 허공에 글씨를 써본다. 내 친구 배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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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당선작
시 부문은 한영희 씨의 ‘응시’ 외 3편이 당선됐다.
가작은 원옥진 씨의 ‘그림자 놀이’ 외 3편이다.
시 부문 심사를 맡은 박덕규 시인은 “‘응시’를 당선작으로 놓은 것은 현실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끝까지 객관성을 유지해 바라보려는 태도를 신뢰하게 돼서다. 이건 시적 견고함에 해당하겠는데, 함께 보낸 작품 모두에 이런 면이 잘 느껴졌다”고 평했다.
박 시인은 “‘그림자 놀이’는 없는 대상을 생생한 존재로 드러낸 그 힘만으로 당선작에 밀릴 것이 없는데 함께 보낸 작품이 이런 수준에 못 미친 아쉬움으로 가작에 머물게 됐다”고 선정이유를 설명했다.
소설 부문은 최민하 씨의 ‘카와라우’가 선정됐다.
가작은 배석봉 씨의 ‘사앙골’이라는 작품이다.
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김선주 소설가는 “‘카와라우’는 취업을 위해 뉴질랜드로 진출해 갖은 고초를 겪어내며 영주권을 취득하여 뿌리를 내리려는 세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리고 있다”며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예술적인 감동을 주는 작가적 역량을 높이 인정하며 주저 없이 당선작으로 올렸다”고 밝혔다.
김 소설가는 “‘사앙골’은 병이 깊어 마지막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미학적으로 그렸다. 하지만 문장을 좀 더 갈고 닦았으면 하는 아쉬움에서 가작으로 정했다”고 전했다.
수필 부문은 이수정 씨의 ‘드므’ 외 1편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가작은 김연희 씨의 ‘붓이 내는 소리’ 외 1편이다.
수필 부문 심사를 맡은 이명재 문학평론가는 “‘드므’는 ‘항아리, 달을 품다’와 함께 필자 자신의 항암치료 체험과 할머니의 유물을 전통적인 문화로 연결시킨 품격을 살린 글로서 돋보였다”며 “서구적인 현대문물 속에서 우리의 옛 것을 되살린 작가의 노력이 가상했다”고 평했다.
이어 “‘붓이 내는 소리’는 글씨와 그림에 애착을 보인 예술가로서 생업에 종사해온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딸의 효심을 잘 그려낸 글”이라며 선정 이유를 전했다.
[출처] 본 기사는 투데이신문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www.ntoday.co.kr)
제2회 당선작
추후 업데이트
직장인 신춘문예 당선작품집(2016~2020,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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