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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門 ) 공모전 정보

[공모] 좋은생각 제16회 생활문예대상 (~2/15)

생활문예대상

공모전 개요

  • 응모 장르: 생활 수필
  • 응모 대상: 제한 없음
  • 응모 기간: 12월 1일부터 다음 해 2월 15일까지 (응모 기간은 그 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원고량: A4 한 장 (10포인트 기준) 또는 200자 원고지 10매
  • 시상 내역
    • 대상 - 200만원 (1명)
    • 금상 - 각 100만원 (2명)
    • 은상 - 각 50만원 (3명)
    • 동상 - 각 30만원 (5명)
    • 장려상 - 각 10만원 (40명)
    • 입선 - “좋은생각” 1년 정기구독권 (49명)
  • 접수 방법
    • 우편 : 03727 서울 서대문우체국 사서함 100호 ‘생활문예대상’ 담당자 앞
    • 팩스 : 02)333 - 0329
    • 홈페이지 : 응모 주제 선택 페이지 > ‘생활문예대상’ 선택 > 응모하기

생활문예대상은 2006년부터 월간 「좋은생각」이 진행하는 좋은생각사람들의 대표 공모전입니다.  매년 한해의 시작과 함께 열리며, 나이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 감동 에피소드, 꿈과 도전, 여행기, 이민 생활의 애환, 웃음, 깨달음을 준 일, 용서, 실패담, 연애담, 후회, 친구, 고향, 아름다운 선택, 직장에서 생긴 일, 반성문, 실수담, 탄생의 비밀, 좌충우돌 육아, 잊지 못할 사건과 사람 등 일상 생활 속 모든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수상작 발표 일정

- 입상자에 한해 3월 중순 경 개별 연락

- 3월 23일 홈페이지 발표

- 좋은생각 5월 호 지면에 입상자 명단 게재

- 좋은생각 2020년 5월 호부터 순차적으로 입상작 게재 예정

 

예선 심사

좋은생각 편집부의 심사를 거쳐 본선작이 결정됩니다.

형식보다 내용을 봅니다.

맞춤법, 글씨 크기, 분량 등은 관계없습니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써 주세요.

유려한 문장보다는 아름답고 따뜻한, 꾸밈없고 소박한 우리네 사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본선 심사

본선에서는 그해 선정된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최종 당선작이 결정됩니다. 심사평을 더 보고 싶다면 '역대 심사위원 심사평'을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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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사연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글은 말과 다르다. 글이란 문장이나 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통제하면서 이끌어 가야 한다. 또 매끈한 글이라도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글은 창작이다.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더라도 자기만의 생각과 발견이 깃들어야 할 것이다. 

 

 - 은희경 소설가(제11회 생활문예대상 심사위원)

 

본선에서는 세련된 문학적 표현보다 삶의 진정성을 얼마나 솔직하고 깊이 있게 녹여 내는가에 비중을 두고 심사했다. 따라서 애써 소설적 구성을 한 작위적인 작품은 낮게 평가했다. 

 

 - 문순태 소설가(제5회 생활문예대상 심사위원)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문예 글들이 알게 모르게 규격화되고 형식화되어 참신성과 독창성이 약화된 느낌을 주어 아쉬웠다. 글이란 자기 삶의 텃밭에 씨를 뿌리고 땀 흘려 가꾼 인생의 결실이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출'이 되어야 한다.  

 

 박상우 소설가(제4회 생활문예대상 심사위원)

 

생활글에서 가끔 보이는 '자기 자랑투'가 결코 감동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반대로 '신세 한탄투' 또한 그러할 것이다. 지나치게 슬픔을 강조하거나 역경 극복투의 이야기 등은 얼마든지 차고 넘친다. 남는 것은 일상이다.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도 의미 있는 이야기 끄집어내기. 그것을 솜씨 있게 풀어낸 것.  

 

 - 공선옥 소설가(제1회 생활문예대상 심사위원)


생활문예대상 대상작품 보기

www.positive.co.kr/board/list/29?page=1

지구 반대편 내 친구(제 15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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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영 님 

 

 

 

몇 달간 미국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을 끼고 있는, 보스턴의 아름다운 학교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유학 가고 싶다고 노래 불렀던 나는 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면서도 무리에 진정 속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럼, 큰딸 잘 지내지. 걱정 붙들어 매셔.” 애써 웃으며 통화를 끝낸 나는 룸메이트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화장실로 달려가곤 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어느 날 새로 신청한 ‘말하기 연습’ 수업에서 인상적인 발표를 들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나무를 꼭 안습니다. 오늘은 나무를 잘 안아 주는 세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히잡을 쓴 인도 여인은 수업에서 단연 최고령자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하지만 어딘가 힘이 있었다. 깊고 큰, 신비로운 눈으로 활짝 웃는 그녀는 미술관에 걸린 명화 같았다. 
다음 날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마당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나무를 안고 있는 그녀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러 다가갔다. 인도 전통 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녀가 코알라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큰 나무를 감싸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엄마뻘 외국인과 친구라니, 존댓말 문화가 없는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아끼는 사람은 나뿐아니었다. 같은 수업의 교수님과 친구 모두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발표에서 부족한 점을 놀랄 만큼 예리하게 집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말엔 따뜻함이 있었다. 우리는 노을 지는 찰스강 변에서 자전거를 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시와 사랑에 관하여, 그녀가 듣는 연극 수업과, 그녀가 맡은 반란군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집에 온 듯한 기분에 뭉클했다. 시간이 흘러 미국 생활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편지와 선물을 교환하며 마지막 만찬 장소로 베트남 식당을택했다. 쌀국수를 먹으며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곧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종교 지도자 집안에서 태어난 똑똑한 소녀가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한 이야기였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그녀 삶의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에서 버려졌고 아이들은 남편에게 뺏겼다. 법정 다툼 끝에 매달 한 번 아이들을 면회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깊이 세뇌당한 상태였다. 그녀는 유리 벽 너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매번 사랑한다고 말했다. 언젠가 아이들을 안는 상상을 하며 매일 나무를 꼭 안아 주는 것이었다.
나는 마법에 걸린 듯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묵은 감정을 털어놓았다. 연약한 여자였던 엄마가 겪은, 감당하기 벅찬 누명과 세상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음이 병들어 어린 딸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원망한 내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깊이 울어 주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한 여자로서 엄마를 이해하게 된 나처럼 그녀의 딸도 언젠가 마음을 열 거라고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넬 때 나는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마지막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로를 꼭 안아 주며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리다는 그녀의 맏딸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는 지금도 종종 메일로 안부를 묻는다. 지구 반대편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된다. 내가 그녀에게서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보았듯 그녀도 나를 보며 자신의 딸을 생각했을까. 시간에는 어떤 관계에서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음을 믿는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녀가 편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밤길(제14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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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님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형편에 더 이상 그림 재료를 구할 수 없다.’라는 건 변명이고, 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며 사는 일에 지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이쯤 했으면 할 만큼 한 거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작업실을 정리하고 2교대 부직포 생산 공장에 취업했다. 내가 하는 일은 부직포 재료인 원사를 종류별로 계량해 기계에 넣는 것이다. 생산 시스템이 자동화되지 않아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보니 육 개월을 버티는 사람이 없단다. 아니나 다를까, 일을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젓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다. 손톱 주위엔 거스러미가 생기고 피가 맺혔다.  의자에 똑바로 앉기 힘들어 복대를 두르고 밥을 먹을 적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 살려고 파리 유학까지 다녀왔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다. 동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언제까지 출근할 것인가.’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삼 년간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산 덕분에 지금은 전반적인 생산 공정에도 참여할 만큼 일에 적응했다. 지난해 12월, 젊은 시절 함께 유학한 옛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식이 끊긴 지 꼭 이십 년 만이었다.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애를 먹었다며 “지금 있는 곳이 어디야? 우리 만나야지!” 하며 목청을 높이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나를 어떻게 보여 줘야 하나, 두렵고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약속을 취소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역에 도착해 군중에 섞여 있는 친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친구는 눈앞에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리며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반가운 만큼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었다. 아직도 선명한 청춘의 기억 앞에 지금 내 모습이 서글펐다. 저녁을 먹는 동안 친구의 얼굴에 언뜻 찬 기운이 스치면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니.’ 하고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둘 걸 그랬다.’  가슴 저리게 후회하며 친구를 밤 기차에 태워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가로등이 길을 훤히 비추었지만 마음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피카소를 꿈꾼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행복하면 좋겠다는 아름다운 꿈을 꾸었지만, 막상 그 꿈에서 깨고 보니 현실이 악몽 같았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누워 있는데 친구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자네를 보며 나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네. 고마워, 자네는 역시 멋진 친구야.” 열등감과 패배 의식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야간 근무를 하다 보면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가는 날이 있다. 아무리 일해도 끝이 없고 도무지 날이 밝을 것 같지 않은 날. 친구를 다시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메모지에 적어 놓았다. “아무리 깊고 어두운 밤이어도 그 끝은 언제나 새벽이었네. 우리 지금까지 그 길을 오십 년 넘게 걸어오지 않았나. 몇 번이고 넘어져도 괜찮네. 길이 어두워서 그런 걸 어쩌겠나. 다시 일어나 걸으면 그뿐이라네.”

사소한 것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제13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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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정 님     

오늘 식탁에는 우리 가족이 제일 좋아하는 삼겹살이 올랐다. 나는 상추에 고기 한 점을 올려 아버지 입에 넣어 드렸다. 이렇게 사소한 일이 행복하고 감격스러워 순간 울컥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설암에 걸렸다. 마른기침과 쉰 목소리, 혀에 돋은 좁쌀. 아버지는 이런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차도가 없자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간 동네 병원에서 대학 병원으로 가라는 소견서를 받았다. 그리고 설암 진단이 내려졌다. 암도 두려운데 ‘혀에 생긴 암’이라니. 게다가 병은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아버지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수술할 것인가, 말 것인가. 수술하지 않으면 전이되어 남은 시간은 길어야 십 개월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수술조차 국내에서 단 한 번 시행되어 성공 여부를 확답할 수 없었다. 혀는 3분의 1만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한쪽 턱과 볼을 절개하고, 전이가 의심스러운 기관지도 동시 개복 수술을 해야 했다. 허벅지 살을 볼에 이식하고 목에 구멍도 뚫어야 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러니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운이 좋아 수술에 성공하더라도 불편한 몸으로 엄마와 내게 짐만 될 거라고 생각했단다. 의사는 그 마음 이해한다며 아버지와 같은 수술을 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환자를 만나게 해 주었다. 아버지 마음을 움직인 건 뜻밖에도 그의 아내가 건 전화였다. “가족을 위해 용기 내세요. 우리는 그이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아버지가 수술을 결심하자 모든 것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나중에 보자, 우리 딸.” 하고 말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 그 문에서 다시 나왔다. 아버지는 한동안 중환자실에 있었다. 나는 할머니 집에 머물며 아버지를 볼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한 달 뒤 아버지를 보러 가기 전, 절대 울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병실에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 나를 향해 벙긋벙긋 입을 벌려도 바람 소리만 났다. 애써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수술은 잘됐지만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했다. 퇴원하고도 그 기간만큼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아버지는 미음만 먹으면서 그 힘든 시간을 버텨 냈다. 그리고 녹음기를 사서 “아, 야, 어…….” 하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듯 연습했다. 매일 저녁 베란다에 나가 녹음기와 씨름하며 점점 긴 단어와 문장을 익혔다. 언젠가 거울을 보던 아버지가 “수술 부위에 다시 혓바늘이 돋았네.”라고 말했다. 가족 모두 혼비백산해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핀셋으로 꺼내 보여 준 건 어제 먹은 된장국에 든 팽이버섯. 그제야 우리 가족은 안도하며 웃었다. 때론 이렇게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매일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경험한다. 밥을 먹고, 말하고, 외출하고, 남들에겐 당연한 걸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혹시 비슷한 상황에서 수술을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용기 내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 가족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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